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근 시모음 본문

OUT/詩모음

김근 시모음

휘수 Hwisu 2007. 11. 14. 12:25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이월」 외 네 편의 시가 당선

2005년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공중전화부스 살인사건

                                             

    때마침 공중전화부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후두둑 지상의 중력과 내통한 첫 빗방울들이 두꺼운 구름장에서 손쉽게 끌어내려진다 사내는 중력에 지친 발을 잠시 쉰다 너무 멀리까지 사내는 흘러왔다 첫 침투에 성공한 빗방울들은 재빨리 거리에 스며든다 물보라 일으키며 보도블록에 새겨진 사람들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녹슨다 눅눅한 예감으로 부스 안은 흐려지고 유리문 바깥으로 흐물흐물해지는 상점 간판들 무거운 짐처럼 가까스로 수화기가 사내의 귀에 매달린다 너를 죽이러 왔다 의뢰인을 밝히진 않겠다 그건 그의 프라이버시니까 너는 가장 사소하게 죽을 수도 있다 갑각류처럼 껍질이 손상되지도 않은 채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이다 가볍게

   비는 거리를 점령한다 후둑후둑 비의 침공은 점점 격렬해지고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커다란 우산을 펴들고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거리를 메우던 사람들 빗방울의 필사적인 저항을 받으며 자동차는 도로를 질주한다 자동차의 속도는 그러나 비의 흡착력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비에게 엔진을 매수당한 채 자동차는 결국 멈춰서고 말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리에서 죽을 수 있는 행운은 아무나 차지하는 게 아니지 네 운명 따윈 이야기하지 마라 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이곳을 가득 채운 곰팡이 같은 예감일 뿐 그건 이미 네 몫이

   아니다 너무 멀리까지 사내는 흘러왔다 부스가 집의 습격을 견뎌낼지 사내는 의심스럽다 비의 침투경로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가늠할 수 없는 바깥 비가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리란 것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몸서리치며 사내는 외투에 달라붙는 빗방울들을 털어낸다 털어내도 거머리처럼 또다시 흡반을 들이대는 빗방울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뻣뻣해진 손이 그만 수화기를 놓치자 사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사내의 무릎 근처에서 대롱대롱 중력에 지친 수화기가 흔들린다 조준되지 않는 사내의 손은 미친 듯이 비치용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죽이러 왔다 의뢰인을 밝히진 않겠다 그, 건 그의 프, 라이버시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2005년 문학동네 


담벼락 사내

 

  오래된 담벼락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내는 얼핏 찌든 세월의 오줌자국이나 부식된 시간이 만들어놓은 얼룩처럼도 보이지만 그의 눈은 담벼락에 박혀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다 쫓기던 사람이 담벼락 근처 그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면 일단 사내에게 혐의를 둬라
  언젠가 취객 하나가 고궁의 어둠 속을 지나다 그의 그림자가 담벼락에 드리워지는 순간 사내에게 덜미를 잡힌 적이 있다 때마침 불어닥친 비바람에 취객은 고장난 우산처럼 담벼락을 따라 굴러다녔다 사람들은 날개가 꺾인 커다란 박쥐인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몸만 빠져나간 옷을 발견한 건 다음날이었다 옷은 아직 온전히 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담벼락 속으로 사내가 취객을 끌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며칠 동안 담벼락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으슥한 담벼락에 기대 키스를 하다 사라져버린 젊은 사내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물렁해진 미처 사라지지 않은 애인의 손 하나를 부여잡고 남은 여인은 담벼락 앞에서 오래 울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오래된 담벼락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아무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지만 오늘도 담벼락엔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사내 하나가 그의 주민을 물색중이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2005년 문학동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황병승의 시  (0) 2007.11.19
우물 / 신용목  (0) 2007.11.16
먼 집 / 손순미  (0) 2007.11.12
적사과 / 손순미  (0) 2007.11.10
경기문화재단 <2007년 사이버문학상 최우수상> / 황종배  (0) 2007.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