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스크랩] 황병승의 시 본문
[약 력]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다. 2003년 <파라21>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주치의 h」 외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이 있다
코코로지의(CocoRosie)의 유령
지금은 거울 속의 수염을 들여다보며 비밀을 가질 시기
지붕 위의 새끼 고양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희고 작고 깨끗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겨울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 위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나는 어른으로서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른으로서
봄이 되면 지붕 위가 조금 시끄러워질 것이고
죽은 물고기들은 닮은 예쁜 꽃들을 볼 수가 있어
봄이 되면 또 나는 비밀을 가진 세상의 여느 아이들처럼
소리치며 공원을 숲길을 달릴 수 있겠지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겨울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가질 시기
<트랙과 들판의 별>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너무 작은 처녀들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 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 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 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死産된 두 마음
땅 속에 꺼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어둠속에서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여섯살의악마가다가와열두살의나를지목할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불안에 떠는 광대처럼
(딸국,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이파리의 저녁식사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열심히 삼십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이에요
사람들과 방금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들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문門
문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나는 조금씩 늙어간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나는 몇 개의 문을 기억하고 있다
아끼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듯 열고 닫았던
후미진 골목의 카페 유리문과
빈방이었지만 나의 노크 소리를
당신의 목소리로 되돌려주던 키 큰 푸른색 문이며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구겨버리듯 박차고 나오던
몇 개의 문들을 나는 기억한다
당신을 만나러 갈 때마다 당신 보다 먼저 만나며
당신 보다 더 오래 이별하는 문 앞에서
한 시절이 흘러갔다
가끔 그때의 문 앞에 다시 설 때가 있다
문 저편엔 어김없이 당신이 있지만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은 또 다른 문 뒤로 숨어버릴 것이므로
문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당신과 나는 조금씩 늙어간다
원 볼 낫싱
흰색-검은색-초록으로 가는 은밀한 순서 울게 만드는 것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여섯 시에 병들고 아홉 시에 죽고 열두 시에 다시 태어나는 굴레
한 소년이 철로 변에 누워 기역자로 죽어간다
밤이다,
꽃술이 달린 소녀의 머리띠가 호수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
하얗게 눈이 멀고,
진창을 지나 아홉 시.
흰색-검은색-초록으로 가는 굴레 울게 만드는 것,
하늘에서 짠물이 쏟아지면, 호숫가의 누이도 젖고 아버지도 기차도 젖고
숨소리조차 젖을 텐데... 들어라 이 엄마의 마지막 잔소리, 검둥아
씻어라 깨끗이 씻고 넘어가라
들판을 지나 열두 시.
초록 물이 검은 언덕을 타넘고 있다
커밍아웃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 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