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스크랩] 한국시100년사<2007년>,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본문
*김수영...거대한 뿌리. 거미. 비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역사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_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 2. 3>
* 이자벨 버나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명령(命令)하고 결의(決意)하고
`평범(平凡)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海草)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透明)한 움직임의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순간(瞬間)이 순간(瞬間)을 죽이는 것이 현대(現代)
현대(現代)가 현대(現代)를 죽이는 `종교(宗敎)'
현대(現代)의 종교(宗敎)는 `출발(出發)'에서 죽는 영예(榮譽)
그 누구의 시(詩)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悲哀)여
결의(決意)하는 비애(悲哀)
변혁(變革)하는 비애(悲哀)……
현대(現代)의 자살(自殺)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無數)한 너의 `종교(宗敎)'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動物)의 교향곡(交響曲)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思索家)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決意)
움직이는 휴식(休息)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
*서정주...자화상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정지용...백록담
백록담(白鹿潭)
□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 2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백록담, 문장사, 1941>
*이상...거울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카톨릭청년, 1933. 10 >
*윤동주...별 헤는 밤.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별 헤는 밤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憧憬)과
별하나에 시(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짬'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김소월...초혼. 산유화. 가는 길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진달래꽃, 매문사, 1924 >
산유화(山有花)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진달래꽃, 매문사, 1924 >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
*한용운...알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
*김광균...설야
설야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기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을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영랑...모란이 피기 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춘수...꽃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인시집, 1967>
*이육사...절정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사시집(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
*이장희...봄은 고양이로소이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금성 3호, 1924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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