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문태준 시모음 3 본문
물끄러미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뽀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사랑
호박꽃 속을 한결같이 맴도는 호박벌처럼
젖을 빨다 유두를 문 채 선잠 든 아가처럼
나오지 아니하고 그 통통한 살내 속에 있고 싶은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엎드린 개처럼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이 묶인 줄을 잊고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눈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히 식기 전에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 문학과지성사
시집 [그늘의 발달]에는 소박하고 평화롭고 정감이 가득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지만, 시인의 조명이 없었다면 잃어버렸을 세계이다.
삶의 감각, 사물의 감각, 언어의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 세계는
사소하고 숨어 있는 섬세한 감각이 얼마나 우리 삶의 깊은 곳을 관통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소용돌이치는 세상살이의 급류 속에서
이 감각들은 조용히 가라앉아 따뜻하게 위무하는 보드라운 언어들을 솟아나게 한다.
시의 깊이는 감각의 깊이이고 삶의 깊이이다.
출처,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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