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제14회 서울시인상 수상작 / 박정자 본문
<제14회 서울시인상 심사평>
시인의 책무와 시의 깊이
서울시인상 수상작으로 박정자의 「나무에 대한 오해」외 10편을 선정했다. 이번 수상작은 남과 다르게 썼다는 점이 아주 새롭고 특별했다. 박정자의 시는 일상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으나 삶의 본질을 새롭게 탐색하고 있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대상을 박정자는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을 구명하는데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상상력을 통해 자유롭게 해석하는데 있다.
「철쭉이 진다」와 「고양이를 잊다」는 언어의 간결성이 돋보인다. 개인의 내장된 언어가 시의 형식을 통해 리듬감 있게 살아난다. 「숭인칼라 사진관」은 강렬한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에서 빛바랜 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잘 연결해주는 미학적 장치로 쓰인다. 삶은 여전히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리들을 끊어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는 마음 속에 그려진 연민의 느낌이 아련하게 표현되어 있다.
심사를 하면서 우리는 「모두 지운다」에 발목이 잡혔다. 이 시는 삶의 역동적 이미지가 아픔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우려고 비벼대면 구멍이 뚫린다”는 표현은 일상의 내밀한 감정을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간결하고 치밀한 긴장감이 절묘한 비유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벼서 만들진 ‘구멍’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절묘한 만남이므로 그 ‘구멍’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박정자의 시는 삶의 기록인 동시에 시어의 특이성에 의해 축소되거나 증폭된 상징적인 이야기다. 일상성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일상적이지 않는 것은 밀도 있는 긴장성에 의해서다. 새로운 시는 갈망이 있는 시인으로부터 씌어진다. 이런 시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 깊이가 얕은 시대일수록 도전은 더욱 값진 것이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시에 깊이를 더 하는 책무를 잊지 않아야 한다. 대성을 기원한다.
<정일남·김용오>
<제14회 서울시인상 수상자 프로필>
박정자 시인│
1957년 목포 출생
1991년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출간│
『작은 배』, (1991, 미래문화사)
『나의 기호는 멜랑콜리다』, (1993, 미래문화사)
『어떤 날의 무리수』, (1996, 시와산문사)
『아홉 마리 새를 위한 즉흥곡』, (2000, 다층)
『창 너머 길』, (2002, 다층)
활동사항│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부천여성문학회 회장
<수상소감>
나무는 높지 않아도 좋다
미루나무 높은 가지에 까치집이 앉았다. 잎이 진 뒤에 나무와 새집은 한몸이다. 서로 근육과 심장이 되어 한 핏줄로 더운 피를 나눈다. 얼지 말라고, 추운 몸을 비빈다.
나무는 높지 않아도 좋다. 새집은 까치집이 아니어도 좋다. 나무와 새집으로 만났으니 그것으로 됐다. 나무가 새집에 들고 새집이 나무에 들었으니 그것으로 됐다. 혼자보다 훨씬 수월하다.
오늘은 볕이 좋으니 움츠린 몸을 쭉 펴보자.
2007년 11월
박정자
<수상작품>
나무에 대한 오해 외 10편 / 박정자
새는 새일 뿐 새가 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해야 하나 방울새 종달새 공작새 이름을 갖기 위해 도장 받아야 하나 새는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설득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고 대꾸하지 않는다 새는 새가 아닌지 모른다 이름은 새에 대한 편견인지 모른다
부르기 전부터 나무는 거기서 항상 나무다 산딸나무 망개나무 가문비나무 누가 불러주어야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야말로 가장 슬픈 오해인지 모른다
물결무늬
수천 개의 가지가 수면으로 내려가 뿌리와 얽혔다 그때 내림은 확고한 오름이었다 부서짐은 단단한 뭉침이었다 부서진 산호가 물결무늬 그리며 틈을 메우고 있었다 숨이 태어나고 있었다
부서진 산호가 밀려왔다 새로운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한켜 한켜 나무가 뻗어나가고 있었다 물결무늬 새기며 언덕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숨이 자라고 있었다
처진 가지와 모래산호가 태반胎盤을 빚고 있었다 물결무늬가 부풀고 있었다 숨이 부풀고 있었다
그림문자
1. 명함
웃었죠 내가 바로 명함이라고, 언제쯤이면 얼굴이 명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방에서 종이명함을 꺼내요 그렇게 소개해요 오래 산다고 누구나 그림문자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2. 물고기
하늘보다 먼저 바다에 별이 뜨는 동네였지요 밤새 낚은 물고기가 방안의 불빛처럼 가득하기를, 말이 통하지 않는 물고기 뱃속을 거슬러 올라갔어요 물고기 문자로 말하며 함께 유쾌했어요
3. 아침
햇살이 나무 사이를 터널로 만들었어요 풀잎 하나하나를 쓸어주는 혀에 윤기가 돌았어요 수평선에서 배가 돌아오고 있었어요 물고기 한 마리가 높이 날아올랐어요 그 순간에, 이해했어요 우리는 모두 그림문자였어요
철쭉이 진다
내리막걸음마다돌이요란하게구른다들어와행세해도괜찮다고주머니를열어보이는손등에검은버섯피었다혼자견뎌본다이름떠오르지않을때까지처음부터없었던것은아닐까의심들때까지혼자있기로한다그렇게하염없이열고있으면주름더깊어질뿐해가진다저무는비탈길돌에미끄러지며손짚으며꽃이진다동네가가까워오는지개가짖는다
오리나무꽃가루
아비는 먹잇감을 따라 숲으로 갔다
어미는 아비를 따라 강으로 갔다
그것은 어미아비를 따라 들판을 헤맸다
말벌들이 떼지어 들소 무리를 따라 가고 있었다
고래 떼가 반짝이며 물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숲의 나무가 쓰러지며 커다란 불을 일으켰다
무엇이었을까, 걸음을 멈췄을 때
숨구멍 두들기며 세차게
목울대를 밀고 나온 맨 처음 말言은
한 무리의 들소가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고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살다 간 움집, 말벌들이 날아와
들판을 가로질러 노랗고 빨간
아이를 등에 업고 길을 갔다
무엇이었을까, 머리를 들었을 때
혀를 떨며 밀려나온 맨 처음 피톨은
먼지처럼 물보라처럼 뇌막을 터뜨려
날이 갈수록 촘촘하게 그물을 엮는
그의 몸통에서 터진 오리나무꽃가루는
고양이를 잊다
허둥대고, 터진 자루처럼 쏟아지는 아침 출근하는 경인고속도로의 쇳소리와 덜깬 잠 쓰리게 깨우는 위경련과 위반하는 탄력을 무시하며 차창에 박힌 빛살을 손등에 문지르는 아침, 아스팔트에 눌러붙어 회색으로 바랜 한 움큼의 가죽과 거기 엉켜 바람보다 먼저 움찔거리는 털 언짢아 퍽 언짢다고 비켜갔어 89.1메가헤르츠MHz를 크게 들으면서
하하하 웃으면서 순환도로에 합류할 때 벨이 울렸어 우리 블루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어요 허둥대고 터진 자루처럼 쏟아지는 아침, 고양이는 알사탕처럼 줄줄 태어나고 고양이는 휙휙 바람에 날리고 길은 합쳐졌다가 나뉘면서 빙빙빙 핸들을 돌리면서
고양이는 없고 고양이는 또 생기고
숭인칼라사진관
달동네를 가보고 싶을 때가 있겠지 그때는 두 계단씩 뛰어올라가 어른이 되었으니 구멍가게마다 들어가 신김치에 막걸리를 한 사발 달라고 해야지 불콰한 얼굴로 꼭대기 비 새던 집을 기웃거려 볼 거야 친구를 볼 수 없는 날 갈거야 먼 데 산다는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잔칫날 가는 거지 초인종을 눌러도 친구는 없지 그러면 아쉬운 듯 짤막한 안부를 문고리에 걸어놓을까
오랜만이다 친구야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늦도록 전봇대 아래서 놀던 생각나니 일부러 오늘 널 보러 왔다 마당이 텅 비었구나 돌아가는 발길이 무겁다 저 아래 전차가 다니던 찻길부터 걸어서 올라오며 골목이 이렇게 좁아졌네 킥킥 집들을 다 새로 지었네 후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안녕 친구가
가파른 비탈은 변함없다고 투덜대며 무릎을 두드리겠지 꽃무늬 옷을 입어도 흑백사진이 찍히는 숭인칼라사진관 컴컴한 계단에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아 그때 찾지 못한 사진을 찾고 싶지는 않아 단지 달동네를 가보고 싶을 때가 있겠지
그래도 새 아니다
주장이 강해서 조금 흠이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다고 뻐꾸기 씨는 남들이 6시를 울릴 때 꼭 혼자서 9시 6분 9초를 가리킨다 하는 수 없이 그래 좋다 9시 6분 9초라고 하자 하면 어느새 12시 12분 18초에 가 있다 말하자면 남보다 항상 3시간 6분 9초 앞서는 것이 뻐꾸기 씨의 신념이다 아무튼 뻐꾸기 씨는
주인을 내쫓고 버찌씨 책상에 앉았다 날 때부터 주인이 있냐 내쫓았다고 말하면 안 되고 자리가 바뀌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내쫓았다고 해야 한다고 버찌 씨도 굽히지 않았다 뻐꾸기 씨는 책상에 앉았다 뻐꾸기 씨와 버찌 씨는 일주일에 다섯 번씩 목록을 가져와 비행기 제작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뻐꾸기 씨는 오로지 기체의 크기와 비행거리에 관심이 있었다 버찌 씨는 오로지 비행기 조종사들의 대우와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발언의 대부분은 삼육구삼육구삼육구놀이로 끝나는 듯했다 비행기 만드는 기술이야 연장통을 고쳐 쓰면 되지 않겠냐고 만장일치를 보일 때는 모처럼 한마음이 되는 듯했다 아무튼 뻐꾸기 씨는
뻐꾸기 씨는 새인가 같은 뻐꾸기마저 눈을 가늘게 오므리는 낌새를 알아채고 자기는 언제나 3시간 6분 9초 앞서 가는 의지의 뻐꾹새라고 며느리발톱으로 휘갈겨 서명한 개벚나무시계를 보아라 담벼락에 박아놓고서 흐뭇한 다리를 책상에 올린다
모두 지운다
1.
컴퓨터가 불량이다 어제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더니 오늘은 눌린 자판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모두 지운다 제목을 써놓고 시작할 때 커서가 한없이 흘러내린다 눌린 시프트키shift-key를 올려 커서cursor를 당긴다 급하게 당겨지면서 모두 지운다 제목까지 모두 지운다 모두 지우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 지우는 일은 망설여지는 일이다 모두 지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져 간단하게 모두 지운다
2.
잘 지내지 장마철이야 운전조심 해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고 쓰지 않았다 말없이 한 시간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쓰지 않았다 답이 없었다 마음으로 읽는 거야 답이 없어 위로가 되었다 고맙소만 뉘신지 저녁에 문자가 왔다
3.
모두 지운다 지울수록 심하게 얼룩으로 번지는 것이 있다 지우려고 비벼대면 구멍이 뚫린다 구멍은 지울 수 없다
시간의 발효醱酵
갈 수 없다고 했나요 가자고 했나요
물어볼 수 없지요 앉지 못 하지요 선 채로 울고 웃지요 선 채로 자고 먹고 쉽지 않지요 태풍이 불면 발꿈치를 들지요 날 수 없지요 몸이 떠오르지 않지요 얼마나 먼 곳일까 생각하지요 갈 수 없는 그 곳을 떠올리지요 발 아래 흩어진 씨알을 보지요 씨알은 누워있지요 나는 서 있지요 이담에 씨알은 토막이 되겠지요 갈 수 없다고 했나요 가자고 했나요 만화 같은 지문地文을 돌려보겠지요 기억나지 않겠지요 앉지 못하겠지요 토막은 기울어진 쪽부터 부드러워지지요 부드럽게 썩지요
그 때는 알게 될까요 앉아도 될까요
버스정류장
버스가 오지 않네 사람들이 모이네 참을 성 없는 저 친구 딴 곳으로 가버리면 떠난 자리야 문제없이 채워지네 버스는 백년 동안 오지 않네 남자는 노인이 되고 소녀는 과년이네
오지 않네 기다리네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행복하네 기다릴 버스 없다면 벌써 없어졌을 거라고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갓난아기 기저귀를 갈아 끼우네
가방을 깔고 앉아 기다리네 고집스럽게 서서 기다리네 고개를 왼쪽으로 길게 꺾으면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시네 박자를 맞추듯 가끔가끔 고개를 꺾어 보네 사람들은 기다릴 버스가 있어서 아무도, 아무도 불행하지 않네 버스가 오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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