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경주 시모음 1 본문
1976 전남 광주
최명희 문학상 수상
2003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당선
꿈꾸는 다락방
촘촘한 여름밤이면 누이는 일기장에 반딧불 만한 글씨를 꾹꾹 눌러 붙였습니다 라디오 속엔 엘비스 엘비스 외삼촌은 밤 하늘 같은 기타줄을 뜯었구요 천장의 어둠 속을 굴러다니던 어린 쥐들의 숨소리며, 비만 오면 무죽 같은 안개가 벽장까지 차던 그 방의 풀 냄새는 따뜻했습니다 아침마다 이불을 털면 눈빛이 순한 풀무치들이 별자리처럼 툭툭 쏟아져 내려 초경을 시작한 누이를 이유 없이 울리기도 했습니다 부뚜막에 끙 앉아 때 걸레를 삶으며 누이가 연습하던 휘파람은 지금 어느 골목을 지나는 바람이 되었을까요 바람이 꿈을 꾸면 어머니는 서랍보다 덜컹거리셨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등을 자주 긁어주며 자랐습니다 펄럭거리는 창문 속 빛이 빵빵한 알전구 아래 우리는 늘 푸른 지렁이들처럼 엉켜 잠들었습니다 어둠 속에 구불구불한 몸을 뒤척이다 문득 닿곤하던 가족의 포르르한 살들이 독학처럼 내내 외로웠습니다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1 바다로 가는 길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떼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 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이스트에 부풀린 빵처럼 비 오는 날이면 휘파람은 방안 가득 부풀어올라 천장을 꽉 채웠다
휘파람이 데리고 가는 길로 끝까지 가지 마라 절벽은 휘파람의 성지이다 벼랑끝에서 다친 말을 버리면 말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간다
갈매기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날아간다
등대가 부는 휘파람은 절해고도의 음역이라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래나 물고기들은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그물을 피하고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내내 이 등대의 휘파람을 들으며 잔다 바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의 옛날 휘파람소리를 듣곤 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이 말을 타고 모든 음악의 출생지로 가볼 수는 없을까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서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백야(白夜)
물소리를 듣고 겨울을 예감하는 새들의 장기는 깊다 젖은 새가 지나갔던 바람의 냄새를 맡다가 나는 약간의 체온이 더 필요했다 인간이 海岸線을 따라 걸으며 밤의 물들이 말아 올리는 채색이 된다 밤들이 바람을 버리고 우수수 떨어진다 물 속에 누워있던 짐승의 눈알 냄새가 번져온다 빛이 벗기고 간 갈대의 뼈들이 차다 구름은 새벽이면 비명보다 투명한 색으로 뜬다 그러나 우수의 四角에서 울음은 생의 속도로 흐르는 법이 없다 수년이 흐른 뒤에도 저 풀들은 불보다 더 짙은 바람의 수분을 태우며 마음을 유산해버리곤 했을 것이다 그때 가만히 타버린 몇 장의 바람과 그늘들을 주워 올리며 나는 풀에게 흉터를 남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제 속의 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점점 색을 띄며 눈보라 몰려온다 눈의 켜켜마다 바람의 분진粉塵들이 매달려 있다 어떤 정신이 저 몸에 불탄 발바닥 하나 올려놓을 수 있을까 새들이 손금처럼 널린 하늘, 무엇을 물은 것인가 나 잠들 곳을 찾지 못해 공중에서 잠든 바람의 늑막까지 차오르는 눈雪을 본다 겨울 열매속의 시원한 물소리를 듣는다 눈眼 속의.
드라이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꼈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夜景을 다 보여줘 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 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 고대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