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장옥관 시모음 본문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87년 「세계의 문학」등단
계명대 국문학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졸업
1991년 시집 「황금 연못」 민음사
1995년 「바퀴소리를 듣는다」 민음사
2003년 「하늘 우물」 세계사
2004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6년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랜덤하우스
걷는다는 것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잃어버린 열쇠
누가 잃어버린 것일까
풀밭에 버려진 녹슨 열쇠
누가 이 초록을 열어보려 했던 것일까
누가 이 봉쇄수도원을 두드렸을까
차가운 촛농으로 잠근 오래된 사원
수런수런 연둣빛 입술들이 피워올리는 기도문
개미들이 땅과 하늘을 꿰매고 있다
아, 저기 호두껍질을 뒤집어쓴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풍병風病든 그의 암호, 누구도 열 수 없다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옛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성대도 늙는가, 굵고 탁한 목소리. 10년 전 이사 올 때 뭉쳐 놓았던 고무 호스, 벌어진 채 구멍 오므라들지 않던 호스가 떠올랐다.
오후에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 흰 모시 치마저고리만 고집하던 노마님이 사돈집에 갔다가 아래쪽이 조여지지 않아 마루에 선 채 그만 실례를 하셨다고-.
휴지 가지러 간 사이 식어버린 몸, 애걸복걸 제 몸에 사정하는 딱한 사연도 있다.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 없는 不隨意筋, 늙음이다. 몸 조여지지 않는데도 마음 사그라들지 않는 난감함,
늙음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실은 남남이듯 몸과 마음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깨달음, 찬물에 발바닥 적시듯 제 스스로 느끼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 이것이 늙음이다.
저물 풍경 속 2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공기 속 차츰 뚜렷하게 제 모습을 찾고 있는
나무들은, 제 벌린 넓이만큼 자리를 잡고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생각으로 무거운 머리를 숙이고 제 속을 흐르는 물줄기를
들여다보면서 때때로 품속에 깃드는 새들을 안아 보기도 한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그래, 그 나무의 전 존재가
흔들리는 것이지 그때 그 나무는 붙박혀 있어도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것 알 수가 있지 새로운 나이테가 그려지고
굳은 껍질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 어떤 힘이 나무의
터진 살을 채워 주는 것이다 뿌리는 한 뼘 더 땅 속으로 뻗어가고
희미한 별빛이 힘껏 줄기를 잡아당기지 나무에 기대는 마음이
거친 손으로 가만히 둥치를 어루만지지
한 그루의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어둠은 깊어 가고
별빛은 더욱 또렷해지고 깊푸른 풀벌레소리가
빈자리를 가득 채우지 언덕 아래 못물이 출렁거리지
어떤 힘이 그를 흔드는 것일까
흔들리며 그를 깊어지게 하는 것일까
마늘
마늘 장아찌를 담그려는지 간장달이는 냄새
온 집에 진동한다
제아무리 성질 사나운 말처럼 날뛰던 마늘도 간장 끼얹으면 잠잠해지니 신기한 일이다
지난 새벽 물 먹으러 나왔다가 본
씽크대 위 통마늘
신생의 기운이라곤 눈 닦고 찾아봐도 없는 겨울 막바지, 밭에서 갓 뽑은 듯 푸릇한 햇마늘
마늘통에 코 갖다 대니
마늘이기 전에 풀이었다는 듯
풋풋한 풀냄새
보늬 쓴 신부처럼 희디흰 살결이다
화장대 앞에 앉은 삼십대 아내의 히프처럼 둥글넓적 퍼진 둔부의 곡선, 보일 듯 말 듯 묻은
수줍은 선홍빛이 에로틱하다
백합과 외떡잎식물 구근에서 백합꽃을 읽어내는 사람이야 드물겠지만 위벽 훑는 비눌줄기의 사나운 미각이란 고삐없이 날뛰는
내 속의 자연,
끓인 간장 단지 속 들여다보니 갓 서른에 혼자된 어머니가 끼고 있던 백동 가락지
음력 음 이월의 그믐달에 들어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