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최정례 시모음 본문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90년「현대시학」에 시「번개」등으로 등단
1999년 제10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민음사, 1994)
[햇빛 속에 호랑이] (세계사, 1998)
[붉은 밭] (창비사, 2001)
천사
간절히 총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 그 생각을 잊었는지 모른다
총을 사러 부산엘 가겠다고
돈을 꾸고 배를 사서 사막으로 뜨겠다고
한때 천사였던
한때 덤불찔레였고 한때 폭약이었던
그가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지금 내 마음속에 없고
돌 속에도 폭풍 속에도
물웅덩이 속에도 없다
그는 그가 사라진 줄을 모른다
바보처럼 한때 천사였던 것도 모른다
너무나 깊숙이 사라졌기에
버려진 폐광의 내 속을 캐고
그는 이제 없다
나 혼자 라이터를 들이대는 웅덩이
떨면서 비추고 다시 일그러뜨린다
그를 비춰볼 웅덩이
그를 파낼 유일한 광부인
나조차 사라지면
그는 아예 없었던 게 된다
그가 잠시 찬란한 천사였던 걸
증거할 자도
세상 천지도
돌멩이 어떻게 새가 됐을까
내 돌멩이는
커서 새가 될 것이었습니다
밤마다 품어주었습니다
황사 바람이 불었고
하늘 골짝에서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돌멩이 따뜻하구나
돌멩이 착하구나
돌멩이 잘도 자는구나
달래고 달래어 재웠습니다
내 돌멩이 재웠습니다
날아갈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이 보고 싶습니다
그와 눈 맞추고 싶습니다
껌벅이다가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이다가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 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이다가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
당나귀 귀의 숲
시간은 무장무장 흘러버렸고
당신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망설이다 묻어둔 그 말
물고기의 말이 되었고
강아지의 말이 되었고
잎사귀 틈에 홍방울새
칡덩굴 속에 자주 꽃
그것들 그 말들
비집고 비집고 돋아난 것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 말 모든나라에 속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만 싶어
그래 수년 만에 나타나 불쑥
입밖에 낸다면
당신 그 소리 느닷없어 알아들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빨갛게 맺는
열매로만 알아듣는 것처럼
언젠가 들은 소리라고
이마를 찌프리고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엉기고 엉겨버린 것들
알아볼 수 있을까
산꼭대기로 기어 올라가서
모래폭풍 속으로 달려나가서
바위구멍 속에 퍼부어두었던 말들
대숲이 되어 수런거리는데
순간에 빈 바람을 부르는데
어디로 데려가 달래주나
어디로 어떻게 불러보나
냇물에 철조망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3분 동안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룰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밥 먹었느냐고
꽝꽝나무야
꽝꽝나무 어린 가지야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날 여보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어린 가지야
꽝꽝나무야
나에게 물어줄 수 있겠니?
여보, 밥 먹었어?
엄마 밥먹었어? 라고
그럼 나 대답할 수 있겠다
꽝꽝나무야
나 밥 먹었다
국에 밥 말아서
김치하고 잘 먹었다
시집, 햇빛 속의 호랑이 (1998년 세계사)
비 맞는 전문가
십여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비 맞는 일뿐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재빨리 나가야 한다
버스 정거장 가로수 아래로
머리에 코에 수염에 빗줄기가
주르륵 흐르도록 해야 한다
주머니 가득 빗물을 채우고
그를 기다렸던 버스가 텅 빈 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서서 비를 맞아야 한다
건너편 창에서
그녀의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과자처럼 바삭거리며
리모콘과 뒹구는 그녀를 위해
가로수 늘어진 가지를 흘러
머리카락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어야 한다
담배는 주머니 안에서 죽이 돼야 한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비 맞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편없이 사랑해야 한다
전근대적 추억을 고용하려고
희생적 지출을 한 그녀을 위해
그는 비 맞는 전문가니까
시집,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호텔 캘리포니아
한 동안 그 노래에 갇혀 흥얼거렸지
콜리타꽃 향기, 의미한 불빛, 내 머리를 만져주듯
한 여자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도 울려왔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대전역쯤의 플랫폼인 줄 알았는가
호텔 캘리포니아인 줄 알았는가
장마 뒤 길바닥 고인 물에 올챙이
햇빛이 총알처럼 되쏘는 그 속을
미친 듯 휘젓고 다니다가
"배추요, 무요, 양파요."
행상의 바퀴가 고인 물 튀기며 지나갈 때
잠시 혼절한 그때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구름 뒤의 천둥소리 아득하게 떨어지고
어떤 춤은 기억되고 어떤 춤은 잊혀지는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너
혼자서 듣고 있지
"어서 오세요, 당신의 이곳의 포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지만 결코 떠나지 못할 걸요."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배추요, 무우요, 양파요오."
그 소리 잊지 못할걸요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 버리도록
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4)
눈발 휙휙
흥남부두는 노래 속에서 내린다. 굳쎄여라 금순아 속에서, 눈보라의 아우성 속에서 엄마아, 꽝 터지는 폭탄 속에서 금순이는 치마를 펄럭이며 하늘 위를 걷는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휙휙. 부두는 폭파되고 배는 이미 떠났는데 금순이 두 팔을 휘젓는다. 겨울 파도 위를 걸어서 걸어서 내려온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서 고꾸라지듯 떨어지다가도 어림없지, 솟아오른다. 바다 갈매기들은 운다. 꽥꽥거리며 운다. 날개 달렸다고 하늘을 날면서도 운다. 명태가 가르는 찬 바다 위를 금순이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걷다가 뛰어내린다. 허공을 가로질러 휙휙
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그는 산벚꽃나무와 여자 그림자 하나
데리고 살지요
그는 돈도 없고 처자도 없고 집도 없고
그는 늙었지요
바위 구멍 굴딱지 같은 곳에서 기어 나와
한참을 앉아 있지요
서성거리지요
산벚꽃나무 기운 없이 늘어진 걸 보니
봄이 왔지요
냄비를 부시다 말고
앓아 누운 여자 그림자를 안아다
양지쪽에 눕히고
햇빛을 깔고 햇빛을 덮어주고
종잇장같이 얇은 그녀도 하얗게 늙어가지요
산벚꽃나무 장님처녀 눈곱 달 듯
한두 송이 꽃 매달지요
그녀의 이마가 그녀의 볼이 따뜻하지요
아니 차디차지요
이 봄은 믿을 수가 없지요
그녀를 눕혔던 자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그녀가 천천히 날아가지요
산벚꽃나무 너무 늙어 겨우 꽃잎
두 장 매달았다 떨구지요
또 봄은 가지요
그녀는 세상에 없는 여자고
그래도 그는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지요
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레바논 감정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하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 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박정대의 시 한 구절을 빌어
달빛이 흔들리는 이유
달빛이 삵쾡이같이 내려와서
지상의 너 강아지풀은
뾰족해진 것
칼과 같이
특이한 식물이 돼버린 것
줄기를 뻗대고 잎을 내밀고
삵쾡이 같은 달빛을
머리 위에 올려 피워보려고
수런거렸던 것
강아지 새끼가 어미젖을 찾아
얼굴을 비비대듯 허공을 비벼
초승달을 상현달을 보름달을
줄기 끝에 차례로 올려 피워보려고
하현꽃에서 그믐꽃까지
그렇게 날마다 서른 개의 꽃을
돌아가며 피워놓으려고
삐죽대고 이죽거리며 흔들었던 것
달빛도 따라 흔들렸던 것
여기는 어디?
벽에 걸린 푸른 옷이 흘러가 바람 불어 푸른 옷 넙치처럼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가 한밤중에 깨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누워 어쩌지도 못하고 내가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
폼페이 최후의 날에 굳어버린 그 여자 바다를 향해 아기를 안은 채 한 손으로 밀려오는 불덩이를 막으려고 막으려고 막을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전신으로 아기를 감싸안고 쓰러지며 바다로 기어가
절벽 위 반쯤 쓰러진 나무 뿌리가 뽑힌 줄도 모르고 어떤 잎들은 타오르게 하고 어떤 잎들은 시들어가게 내버려두고 비린 바람에 나부끼며
그 여자 굳어버린 돌덩이 바로 눈앞에 파도 소리 듣는지 마는지 머리카락을 바람의 빗으로 빗으며 화산 폭발 이후 식은 용암의 모자상이 된 줄도 구경거리가 된 줄도 모르고 아직도 바다로 바다로 가겠다고
악취와 향기의 추락과 상승의 포옹과 공격의 길고 긴 시간을 오르내리며 한밤중 절벽에 매달려 쓰러지며 기어가며 흘러가는 여기는 어디?
밤 비행기에서
비행기가 조용히도 떠 있어
동그란 창 밖의 저 불빛
저게 눈물이라구?
곰팡이의 팡이실 같은
거미줄에 은구슬 같은
눈물은 아니라니까
풀줄기 아래
착하게도 엎드려 있는 무당벌레잖아
막 부화해서 날개를 터는 불나방이야
글쎄 아니래두
잘 봐
가로를 따라 천천히도 기어가는
헤드라이트 벌레들이지
흐느끼는 게 아니라니까
줄을 서서 꽃밭의 새끼줄을 오르고 있잖아?
병자나 광인이
신음과 절규가 어디 있어?
부르르 떨다가 제풀에 꺼져버리는
땅을 기는 별들이지
이 창의 동그라미에 갇히면
굽고 휘는 거야 엉켜버리잖아
오천 피트 상공에선
눈물이 아니라니까?
무당벌레 등판에 찍힌
점 하나가 되는 거야
글쎄 아니래두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