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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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12. 8. 12:00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86년<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론집「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

평론집「붉은 시간의 영혼」
제5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2005년 제20회 소월시문학상

 

가을의 옛집

 

가을의 옛집 저 곳, 구부러진 발톱을 바라보며
스산하게 등을 기대던 가을의 번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흙 틈에 끼어 쓰린 소리를 내며 부서지던 곳
청춘의 집이 그렇게 구부러져 있었으니
낮이 가고 밤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 어쩔 것인가
누가 저 집의
누룩 슬던 방을 기억할 것인가

아직도 숨골에 오목하게 남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연기로 피어 오르는
상처들의 누옥

나뭇가지가 스산하게 그리움을 부추겨 세우는
또 다른 가을의 땅에
아물지 못한 상처들만 모여 검은 잎사귀로 뒹군다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트럭 행상에게 오징어 10마리를 사서
내장을 빼내 다듬었다. 빼낸 내장을 복도 쓰레기봉투에
담아 한 켠에 치워 두었다. 이튿날 여름빛이
침묵하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 핏기 없는 육체와 섞이는 동안
오징어 내장들은 냄새로 항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장마가 져 나는 지붕 위에 망각을 내리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헛된 소음에 방문을 걸고 있을 때
살 썩는 냄새만이 문틈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약한 냄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방안 가득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냄새에도 어떤 갈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더러운 쓰레기를 힘겹게 내다
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복도의 문을 열었다
비가 멎고, 싸우고 난 뒤의 불안한 평온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공기가 젖은 어깨를 말리고 있었다
발자국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열쇠로 지옥 같은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쯤
핏기 없는 냄새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무덤에는 냄새의 뿌리로 태어난 수많은 구더기들이
시간의 육체 속으로 흩어져 갔다

 

여름말 사전

  

여름이 갈 때 용서하자, 푹푹 찌는 더위가

등에 자꾸만 들러붙어 옷이 하루를 만들 때

생각이 들어앉을 틈이 없는 여름은 용서하기 좋을 때이다

여기, 가고 싶은 집이 그리움을 부르면 먼 거리에서

물결이 흘러서 간다 여름은 봄을 닮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이 펄럭인단 말인가

거리에서 모든 것들의 힘을 입어 저 먼 길과 싸운 사람은

너의 집을 너에게 짓는 자리에 누워

지붕의 노래에 고요히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이 나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평정을 다치는 일들이 미움을 이길 때

저녁의 식탁에서는 용서한 자와 용서받은 자들이 모여

여름의 가르침에 여름의 땀방울을 노래하리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9,10월호

 

        겨울 저녁의 시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받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 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제20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명태


돌을 물에 던지자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마음에 연못이 있다는 소리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을 때
그것은 마음의 어떤 곳을 꽃밭으로 바꾸는 일
제주 공항,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여자가 보따리를 들고
대합실을 빠져나가고 있다 반바지와 선글라스의
왁자한 틈 사이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보따리 틈에서 삐죽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명태
사내와 여자는 둥글게 말려오는 더운 땀을 닦아낸다
이윽고 바람이 서식지를 잃은 듯 주름을 늘리며 다가올 때
그 뒷모습을 보며 망막을 다치는 일은
풍겨 오르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 일
혹은 여행의 기분을 검은 옷과 바꾸는 일
애써 마음의 어떤 곳에 파도를 세우는 동안
반바지와 선글라스들이 버스에 오르고
사내와 여자가 들뜬 틈 사이로 스며들자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들이 팔랑거렸다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2005년 문학사상)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이 거리, 노래가 되다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 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시간의 동공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 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 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승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제20회 소월시문학상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아버지의 입에서는 구린내가 나지

말의 상자 속에는 하얀 알들이 고물거리고

상자의 상자 속에는 악어의 이빨

가는귀가 먹었는지 칼을 꽃이라 하고

개코 같은 코로도 자기의 입내는 맡지 못하지

아버지 사랑은 소녀의 음부

보슬보슬한 털 속에서 쩝쩝 깨어나

내게는 다리를 모으라고 가르친다네

 
정육점 

                              

완벽한 육체를 이루었던 소는 칼에 찢겨

피에 젖은 갈고리에 걸려 있다, 가끔씩 날파리들이

핏물을 빨다 냉동고 위로 날아가버리면

몸에서 쫒겨나간 영혼만이 갈고리 주위를 맴돈다

바닥에 핏물을 떨어뜨리는 기억의 몸뚱이

마치 남은 말이라도 쥐어짜듯 팽팽한 얼룩들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거푸 숨을 몰아 내쉬며

한 방울의 핏빛 눈물을 짜낸다

진열대 속 자동 분쇄기에 가지런히 썰려 있는

살점들, 한 그루 시간의 붉은 잎사귀처럼 서로 몸을

포갠 채 지독한 적막 속에 끼어들 때

일생을 캐묻듯이 깃털들이 펄럭인다

게으른 책임을 두 눈 속에 퍼부었을 소

그러나 이제, 시간에게 상속받은 것이 얼룩뿐이라는 듯

붉은 燈을 바닥에 하나둘씩 켜놓는다


하늘로 가는  단칸방  

 

방이 있다 그 방은 물에 젖어

시간에 떠 있다

 

늙은 어머니가 중풍으로 누워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고

 

삼십 년을 넘게 건사해 온 장애 아들은

못에 노끈을 매고 있다

 

말 못하는 어머니 사지를 뒤틀며

의자 위에 선 아들을 올려다 본다

 

툭!  의자가 굴러가고

노끈에 목을 맨 아들이 컥컥거릴 때

 

그 온몸으로 쥐어짠 눈물의 힘으로

단칸방 하늘로 올라간다

 

木蓮


어둠을 밀어내려고, 전생애로 쓰는 유서처럼
목련은 깨어 있는 별빛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는다
저 목련은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목을 가까스로 세우고
희디흰 몸짓으로 새벽의 정원, 어둠 속에서
아직 덜 쓴 채 남아 있는 시간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으로부터 헤쳐 나오는 꽃잎들이
겨울의 폭설을 견딘 것이라면, 더욱 더 잔인한 편지가
될 것이니 개봉도 하기 전 너의 편지는
뚝뚝 혀들로 흥건하리라, 말이 광야를 건너고
또한 사막의 모래를 헤치며 마음이 우울(憂鬱)로부터
용서를 구할 때 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똥거리다 힘이 뚝 떨어지고 나면
맹인견처럼 나는 이상하고도 빗겨간 너의 그늘 아래에서
복부를 찌르는 자취와 앞으로 씌어질 유서를 펼쳐
네가 마지막으로 뱉아 낸 말을 옮겨 적는다

 

황야(荒野)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다 까닭이 있어
제 그림자를 둘러본다, 너무도 고요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라져 간 것들의 중심에 되돌아오는 음성을 섞는 것을
발자국마다에 비틀거리며 고운 뺨들이 일어선다
이제 저 고운 뺨들은 자신의 숙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편도선이 부어오른 채
돌아가지 못한 발자국에 견주어 다시금 자신 안으로
발을 디딜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덤벼드는 온갖 것들의 짐승과 싸우며 모자란
지혜를 더듬을 것이다, 용서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생이 다 가고 나서야
끝마칠 것임을 안다, 하지만 까닭 없이 고이는
목숨이 푸르고 질긴 것들에 힘을 빼앗겨
더운 정의로도 달래지 못할 때 것들로도
자신이 설 땅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이 자신을 눈감아줄 때까지
저처럼 움직이는 것들에
숨을 비비기도 하는 것이리라

 

  새벽이 온다

 

  저렇게 새벽이 밀려들어 오면 밤을 의지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어둔 속에서, 어둠의 마음속에서

  몽롱한 노래들이 몸을 비벼주었건만

  저렇게 소리 없이 새벽이 밀려와 거뭇한 자세로

  사람들을 세워두면 이들은 또 어디로 숨어들란 말인가.

  어둠에 몸을 풀고 술의 노래에 허무를 이기다

  어디론가 흩어지는 사람들

  새벽은 아가리를 벌려 하늘의 수많은 별을 잡아먹고

  핏빛 광선을 세상에 흩뿌리는데, 어둠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제 속에 어둠을 만들어놓고 한사코 그 속에

  스며들고 있는데, 아아, 아가리가 있는 것은 무섭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내가 소년이었을 때 별이 있었다

   여인들은 막대기를 들고 울음을 쫓고

   회당 뒤편에는 고분이 언제나 푸르렀고

   우두커니 봄이 지날 때 꽃잎 다 져 열매 맺힐 때

   별이 있었고 여름인가가 있었다, 마을이 세상의 전부였을 때

   마을의 꽃과 별이 세상의 전부였을 때

   아궁이의 불빛에 울음을 닦아 낼 줄 알았다

   마을과 마을이 섞이고 여름과 가을이 섞이고

   이승과 저승이 섞여 눈보라 치는 울음소리를 낼 때

   나는 식민지가 되어 굴욕을 낳고

   제복을 입은 채 꽃잎 아래 서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도 평화를 꿈꾸는 자들이

   종소리를 울리고 생애를 예고하려는 듯

   여름이 겨울처럼 늙어갈 때 이제 울음이 나조차

   비웃으며 흔혈의 땅에 식민지의 깃발을 나부낀다.

 

  浦口(포구) 

  1

 

  강기슭에는 철새의 무리들이 떼지어 있고

  갈대들이 다소곳이 몸을 굽히는 저물 무렵

  바람은 저녁노을 층층이 건너 이곳으로 오리니.

  바람 앞에서 그 많은 기도와 묵상을 하였던 날들은 얼마이던가.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다

  실의로 저녁 밥상을 대하던 날들은.

 

  남아 있는 자의 자욱한 먼지와

  진실로 미더운 눈으로 창을 보며

  아침이면 수련꽃이 손을 흔들고

  저녁이면 수북히 떠 있던 별의 빛나던 의미.

  잃은 것은 잃은 채 잊혀진 것은 잊혀진 채 돌아서지 않는 발길로

  스스로의 중심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금 잔물결 이는 기슭의 갈대처럼

  부스럭거리며 눕혀지지 않는 불면의 잠들.

 

  2

 

  새벽 총총한 걸음으로 오리라.

  기다리는 순절만으로도 행복한 날.

  날이 새면 기억하는 자의 가슴만

  혹독한 멍이 들거늘

  밤은 어찌 이렇게 바람만 안겨다 주는지.

  끝끝내 살아 잊어버렸던 것들이 깨어 오는 무렵

  한밤내 뒤척인 방안으로는 쩡쩡히 눈시린 해.

  저 강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까지

  갈대들을 눕히고만 있을 것인가.

  철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물결만이 허허롭게 남아 있어 기다리는 자의 일렁이는 가슴은

  닮아 머리를 날리며 서 있는 이곳.

  저 무리지어 날아가는 무심한 철새들이 알겠는가.

  돌아서지 않는 발길로 스스로의 중심으로 돌아간 뒤에라도

  잔물결 이는 기슭의 갈대처럼

  부스럭거리며 눕혀지지 않는 잠들을.

 

 시집, 꿈의 이동건축(천년의시작, 199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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