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이수명 시모음 1 본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 국문과를 졸업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우리는 이제 충분히」 외 4편의 시가 당선
시집으로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등이 있다.
2001 제 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화물차
빈 화물차가 지나간다.
나는 가방 속을 뒤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책갈피 사이를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할퀴고, 할퀴고, 할퀴고, 나의 이단은 나의 오독에 불과했다.
모든 주름은 펴기 전에 펴진다.
내 가방 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빈 화물차가 거리를 메웠다.
나는 허약해지는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가방을 뒤졌다.
세상의 모퉁이들이 닳고 있었다.
세상의 기다림들은 세상의 모퉁이들을 닳게 하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기억의 경계들이 문드러졌다.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 없는 화물차가 지나간다.
나에겐 새로운 이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빈 화물차가 지나갔다. 내 앞을,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새벽 세 시
이기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하고
이기지 못하는 위도에 매달려 있다. 이기지 못하는 게임을 하고
이 집중은 얼마나 황홀하냐
얼마나 시간을 버는 것이냐
세상의 집들, 세상의 다리들, 땅속을 흘러가는 하수구들의 무서운 집중이여, 이기지 못함이여, 위태로움이여.
되풀이되면서 사라져 가는 세상의 품들
오늘 벌써 이만큼 멀어진 너의 품은 한없이 위태로워
병든 알을 품은 닭은 위태로워
아, 어디로, 어느 곳을 떠나가다가 멈추었느냐. 위로 올린 것보다 더 많은 보이지 않는 팔을 내린 나무들아, 지상에 내리지 못하고 남겨진 얼룩진 먹구름들아.
어디에서 멈추었느냐, 위태로운 사정을 거슬러 일생의 또아리 풀어버린 바람아, 위독한 미래를 이기지 못하는 바람아.
둥근 잠
구부리고 새우잠을 잤다.
몸이 무너졌다.
무너진 것들을 모았다.
내 뼈는 둥글게 되었다.
내 잠은 둥글게 되었다.
눈 뜨고 걸어다녀도
나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잠은 열매처럼 달고 둥글어
열리지 않았다.
더 단단해지기만 했다.
잠은 씨앗을 향해 파고들었다.
눈 뜨고 걸어다녀도
내 몸에는 창이 없었다.
나는 닫혀 있었다.
나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부서졌다.
부서진 것들을 모았다.
나는 완전히 구부러지고 휘어져
둥근 혹성이 되었다.
눈먼 운행을 계속했다.
시끄러운 꿈들이 떠들어대도
입을 다물고 사라져가도
나는 씨앗을 향해 파고 들었다.
눈먼 운행을 계속했다.
열린시학, 2005년 봄호
수 염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벽 속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
밀어넣는 자신의 동작까지
남김없이 넣어버린다.
그리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그 낯선 것은 얼마나 뒤늦게 떠오르는 것일까.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깎인 얼굴들이 세면대로 떨어진다.
뾰족한 얼굴들
새파란 얼굴들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물고기의 죽음
물고기가 죽었다
물이 가득했다
물이 벌거벗은 채 가득했다
나를 헤엄치던 물고기
나를 찿지 못한 물고기
나를 으스러뜨린 물고기
물고기는 타일 바닥에 녹슬어 있었다
물살은 물고기를 떠나 녹슬어 있었다
나는 녹슬어 있었다
얼굴에 꿀을 바르고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여름호 발표
나를 구부렸다
복도 끝에 너는 서 있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 피어난 바닥의 꽃을 향해
그때 숨어든 꽃의 그림자를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구부러진 채
나는 펴지지 않았다.
복도를 떠돌던
나의 빛은 구부러진 채
나의 나날들은 구부러진 채
펴지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때 흔들린 꽃에 대해
그때 사라진 꽃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구부러진 채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깨진 빗방울
창을 붙잡고 있는
빗방울들이 모두 깨져 있다.
하늘이 깨져 있다.
태어나지 못한 말
깨진 말
사라져버릴 말들이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뇌가 떨어지고
뇌를 감고 있는 폭풍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창이 깨져 있다.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고
처음부터
깨져 있었다.
창작과 비평, 2005 여름호
공놀이
좁은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돌아서 가려는데 공이 굴러왔다. 나는 잠시 공을 내려다보았다. 진흙 한 점 묻지 않은, 초록빛 신발을 신은 둥근 달팽이였다. 달팽이들이 복귀하는 계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그것을 아이들 쪽으로 높이 띄워주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보며 공을 향해 팔을 벌렸다.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 민음사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자신을 찍으려는 도끼가 왔을 때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켰다.
폭풍우 몰아치던 밤
나무는 번개를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깊이 찔리는 번개를 삼켰다.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 민음사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가 번진다
나무의 잠 밖으로
나무의 짧고 긴 손등이 번진다
손을 쳐들어
나무는 구름덩어리들과 싸우지 않는다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가 침몰한다
침몰한 채 제자리에 서 있다
나무는 불가능한 모빌이다
공중에 매달리지 않는다
도시를 건드리지 않는다
도시가 침몰한다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를 세우며
나무의 퍼즐들을 뒤섞으며
나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숨어서 기다린다
내가 숨어들기를
내가 목을 맬 순간을
숨어서 기다린다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