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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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12. 9. 23:12

   

196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청소부>,<제비집>,<달팽이의 꿈> 당선
김수영문학상 수상 (2004년)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푼 곳에 자꾸 손이 간다>
산문집, <거울을 둘러싼 슬픔>
    

 

     버려진 식탁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들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기침


        주먹을 불끈 쥐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
        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
        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
        새벽 4시를 알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뭉텅이별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너희 아버지는 금 캐러 가기 전에
        금 캐러 갔다와서
        네 눈을 바라보곤 했다.

 

        삼십 후반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흘려놓고
        어머니
        비닐집 속으로 사라진다.

 

        뿌옇게 물방울 열린 비닐집.
        갈빗대 튀어나온 비닐집.

 

        경운기 몰고 풀 깎으러 가는
        넥타이 허리띠 졸라맨 아버지.
        
시금치밭

 

성환고등학교 소사 아저씨가 일요일마다
찔통에 인분을 퍼와 뿌리는 시금치밭.
철조망이 세 줄로 쳐진 시금치밭.
봄마다 시금치가 치고 올라와 휴지가
보이지 않는다. 내겐 왜 인분 냄새가
나지 않았나. 겨울 시금치밭이었나.
나는 왜 네 생각만 하고 살았나.
몇 번이나 갈아엎어졌나.


화려한 유적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 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식당


한 그릇 짬뽕을 시켜놓고
흰 플라스틱 컵을 들었다.
짧은 머리카락 하나가
바닥 귀퉁이에 빠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짧은 금이었다, 때가 낀
짧은 금이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것뿐인데
컵에 있던 금이
내 머리속에 옮겨와
선명해졌다.

 

밥을 시켜놓고
혼자 앉아 있을 때마다
컵을 확인하게 되었다.

 

네 부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매미  

 
개천 둑 철사 그물 푸른 피복 위에서 매미가 운다
포플러가 그늘을 드리운 그곳 가시풀이 뒤덮은 그곳
산딸기가 열매를 식히는 그곳 홍수가 휩쓸고 간 그곳
스티로폼이 알을 슬어놓은 그곳 비닐이 침을 흘리고
늘어지게 자는 그곳 비스듬히 주둥이를 쳐든 페트병
폐수의 눈금을 낮춰 가는 그곳 칠이 벗겨진 트럭 대가리
뒤틀리며 지나간 그곳 포플러 그늘이 뒤척이는 그곳
산업도로 지나는 바퀴 소리 빗물을 깔아뭉개는 소리
말려오는 그곳 매미가 운다 개천 바닥 홍수가 휩쓸고 간 풀이
흙염을 말린다 산업도로 공장 레인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개천 바닥 홍수가 휩쓸고 간 풀이 각도를 세운다
허리에 비닐을 감고  흙염을 털어낸다
풀은 일어난다 풀은 일어나며 자란다


짝사랑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물풀을 위하여

 

흙탕물이 떠내려가는
조그만 다리 밑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마가 지난 뒤
장마가 남기고 간 비닐류들
플라스틱류들,
나뭇가지에 뒤엉켜 있었다

머릿속과도 같이,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언젠가 맑은 물이 되어 흐를 것이었다.

장마가 훑고 지나간 뒤,
미끌거리는 물때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물풀의 줄기들
고통의 춤을 즐기고 있었다.

무엇이든 끌어가고 싶어하는
세월의 힘이여, 그것 없으면
물풀들은 타 죽을 것이었다.


늙은 참나무 앞에 서서

 

무수히 떡메를 맞은 자리에
엄청난 둔부 하나가 새겨졌다
벌과 집게벌레가 들어와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빨아먹고 있다
저긴, 그들만의 천당이다
누군가에게
내 상처가 천당이 될 수 있기를
내가 흘리는 진물을
빨아먹고 사는 광기들!
다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다
누군가 떡메를 메고 와
열매들을 털어 가기를
더 넓게 더 깊게
상처를 덧내주기를
누군가에게 가는 길,
문을 여는 방법,
그것밖에 없음을

 

1985년

 

다리 위에 물안개 걷히면, 보인다
저승에서 돌아오는 공원묘지 경주.
시간이 정지되고, 못박힌 나를 데리러 버스가
뒤로 달려왔다. 한동안 정류장이 무시되었다.
물안개 속을 지나온 자들의 구역질 흔적이
쌓여 있었다. 군데군데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강물에서 똥냄새가 났다. 새벽의 물안개 속에도
똥냄새가 났다. 우린 똥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보고 싶어
하루종일 낚시질을 했다. 똥물이 밀려왔다.
우린 모두 참을 수 없었다. 빈 술병처럼 버려졌다.
엉뚱한 내용물을 채우는 버려짐, 몇몇은 사생아를 낳고
과거 없는 곳으로 떠났다. 녹슨 종탑에서 은은히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들었다. 아침부터 미치고 싶어, 붉은 단풍들어
조용히 미치고 싶어, 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산이 대답 안 할 때까지
우린 단풍나무야, 헛살고 있는 게 분명해, 매미가 울었다.
우린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웠다. 매미들이 골목 밖으로 나와
화투를 쳤다. 얼굴보다 큰 부채를 접고. 무료에 지쳐 껌 씹으며 우리는
눈물 없이, 골방에서 나왔다.


아침고요수목원

 

언젠가는 슬쩍 갈 수도 있겠지요
진창으로 폭우가 들이치는 날 길에 물이 흐르는 날
길이 뒤집히고 파이고 동강 나는 날
아침고요수목원에 가는 날 있겠지요

계곡 가득 메우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더미
물굽이 물의 험한 주름살 보고 올 날 있겠지요

민박집 평상에 앉아
삽겹살 굽고 모기향 피우고
젖은 담배 말려 피울 날 있겠지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맑은 소주잔 들이키면
언젠가 비가 그칠 날 있겠지요
물이 줄어들 날 있겠지요

내 가슴 잃어버린 맑은 音 찾아 들을 날 있겠지요
맑은 音 전신을 전율시킬 날 있겠지요

 

까치집

 

감나무에
새끼를 쳐 나간 까치집이 남았다.
감나무에
한참 좋은 화력을 가진 삭정이
나무 곳간이 남았다.

둘이서,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마음 곳간에 삭정이가 남았다.

하루 해가 저물어갈 때
환한 마음의 아궁이에
불이 지펴진다.

솥뚜껑 들썩거리며
쌀밥이 익어간다.

감나무에 머문 홍시 노을
한참 가마솥에 뜸이 든다.

침이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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