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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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시모음

휘수 Hwisu 2008. 5. 26. 08:49

충남 천안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
제5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2004년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 천년의 시작)
산문집, <행복한 난청>
2007년 시집, <저녁의 기원>랜덤하우스


물밑의 피아노

 

  누나가 바늘에 꿴 실로 글자를 쓴다, 작은 집들이 산턱에서 사라진 후 케이블카가 그 위를 종일 왕복하고 있었다. 누나, 피아노들이 떠오르고 있어. 앞코가 찢어진 신발 속으로 물이 드나들고, 누나의 글씨쓰기는 앞과 뒤가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누나가 쓴 글자는 한없이 느려져 겨울이 되어서야 한 장의 편지가 될 것이다. 억울해 억울해 지덕노체 4H구락부 마크가 찍힌 무너진 집 벽을 끌어안고 청년이 울 때 그의 나이 많은 두 형제는 발톱을 깎고 있었다. 생애 이렇게 눈부신 날, 누구나 자기 눈을 찌른 첫 번째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누른 검은 건반을 누나의 흰 건반이 감쌀 때, 피아노의 다리들은 물 밖을 나오지 않는 것으로 여름과의 약속을 지켰다.


흑백사진 

 

  구멍 좁은 단추의 안쪽이 너에게 마음을 달아준다 그해 국광의 붉은 빛깔, 자기 무릎에 머리를 대던 어미소의 평화로운 열병, 물옥잠의 구멍난 부레가 모두 바둑돌의 黑과 白이었다. 지천의 꽃들이 허공을 향해 시작되던 하혈도, 네가 빨아들던 담배 끝 새빨간 불꽃도 다만 개의 눈이 바라보던 흑빛 세상.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오빠, 몇 해 동안 분갈이 해보지 못한 오빠, 이삿짐 속 허름한 이삿짐이던 오빠,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면 네가 흘린 얼룩들이 고분고분 닦여나왔다. 대야에 담긴 빨래처럼 누군가 헹궈주기를 바라며 마음이 세제거품 몇 알갱이에 의지해 둥실 떠있다. 골목마다 칸칸이 놓여있던 쓰레기통들이 모두 네 고향이던 때, 남루한 밤이 네게 마음을 매달아 준다. 한밤 뒷간에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 훗날 애인 얼굴이 나타난대, 기억이 포도알처럼 자주색 피를 쏟으며 달게 터졌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운명인가 봐, 수은칠이 반쯤 벗겨진 거울 안에서 나는 너를 흉내내며 비스듬히 잘린 채 반쯤 웃었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년 천년의시작)


길을 향하여


 비가 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건드리며 걸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오 월

 

 비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타는 소리보다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적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길을 향하여

 

 비가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

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두드리며 걸

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

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

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

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년 천년의시작)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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