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제 15회 <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정연희 본문

OUT/詩모음

제 15회 <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정연희

휘수 Hwisu 2007. 9. 6. 09:08

제 15회 <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정연희

 

충남 홍성 출생

성신여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붉은구상나무의 요술장갑 / 정연희

 

붉은구상나무는 가지마다 눈장갑을 두툼하게 끼고 있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쪽이 뭉툭뭉툭하다
소복이 눈이 덮인 눈 장갑 속으로
끊어진 가지 뼈가 보이고
그 상처에 굳은살이 볼록하게 올라와 아문 것 같았다
상처에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들끓는지
소복이 덮어주는 눈의 온기에 감각이 살아난 듯
김이 오르곤 했다
언젠가 보았던 요술장갑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낄 수 있는 만능장갑입니다
사내는 장갑을 꺼내 지하철 승객들에게 펼쳐 보이더니
손을 쫙 펴서 장갑을 끼었다
검지와 무명지 없는 손가락이 약간 아래로 처졌지만
장갑 다섯 손가락이 상처를 감싸자 멀쩡해졌다
그때도 나는 사내의 끊어진 손가락에
무언가 자라는 걸 보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만능장갑이 아니라 요술장갑이라고 생각했었다
붉은구상나무가 문득 양털 빛 요술장갑을
내게 내밀고 있다

 

달의 흔적 / 정연희

 

그날 낮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산언덕 층층나무 계단에서 흰 얼룩을 보았다
바닷물이 층층나무 계단 꼭대기까지 밤새 잠겼다 빠졌을까
소금기 같은 흰 얼룩이 생겼다
해안선 따라 모래사장에 그려진 파도 무늬처럼
층층나무 계단에 물거품 이는 파도 출렁이고 있다
언젠가 새조개 속껍질에서 저 층층계단의 파도 무늬를 보았다
부드러운 속살을 떼어낸 자리 양수물이 흥건했다
새조개의 들숨과 날숨 때마다 바닷물이 남긴 파도무늬였다
달이 바닷물을 따라 들어왔다 나가며
새조개 속살을 여물게 한 힘이다
내 어머니의 배에도 저런 파도무늬가 숨겨져 있다
초승달과 만월이 교대로 떠오르는 동안 겹겹이 생긴 주름에
파도무늬가 깊이 새겨졌다
층층나무 계단의 저 파도무늬는 생명을 가진 흔적
지난밤 한 생명을 층층나무 계단에서 잉태시켰다

다시 만월을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호랑거미의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史官이다
그는 가늘고 질긴 실로 짠 둥그런 천을 올리브나무 가지 사이에 내걸었다
씨실과 날실의 간격이 일정한 흰 비단 천이다
호랑거미가 그 천 위에 엎드려 史草를 쓰고 있다
물감을 찍어서 가는 세필로 깨알처럼 써내려갔다
햇살을 받은 글씨를 들여다보면 무지개 빛깔이다
중요한 일은 올리브 새순 같은 연두와 흰 물감을 듬뿍 찍어
굵은 글씨로 써놓았다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서
고대 상형문자 같은 글씨를 해독하기로 했다
그 글씨에는 거미들의 오랜 역사가 낱낱이 적혀 있다
그의 조상 아라크네는 베를 잘 짜는 여인,
자만심에 여신과 겨루기를 하며 신들의 비행을 모조리 짜 넣었다
여신보다 천을 더 잘 짰지만 시샘을 받아 거미가 되었다
지금 저 호랑거미가 그 솜씨를 이어 받아 깨알 같은 글씨를 써내려간다
두루마리 천을 짜는 방법과 물에 젖지 않게 하는 방법이 쓰여 있다
저 호랑거미는 오랜 세월
천에다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서사시를 썼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그 내력을 기록할 것이다

 

줄을 슬쩍 흔들자 호랑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호랑거미가 나와 겨루어 질긴 천 위에 내 일상을 속속 기록할 것이다
저 씨실과 날실에 내 비행을 새겨 넣을 것이다

 
그 산에 칼레의 시민들 청동상이 있다 / 정연희

 

그 산에 가면 '칼레의 시민들'이 청동상으로 서 있다
산길은 몇 미터 앞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바로 눈앞의 나무만 보이고 그 나머지
나무는 형체만 희미해서 배경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안개 낀 이른 봄날 등을 대고 무리 지어 서 있는 나무를 보면
나무들이 내게 걸어오는 듯 어슴푸레하다
안개 자욱한 산에서 나무들을 보면 '칼레의 시민들'처럼 보였다
두 손을 움켜쥐고 저벅저벅 앞으로 다가오는 나무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쥔 채 고뇌하듯 일그러진 나무
손에 열쇠를 쥐고 망설이듯 서 있는 나무
배경은 다 지워지고
굳은 결의를 다짐한 엄숙한 표정으로 나무가 내게 다가왔다
나무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함께 갈 거냐고 묻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안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겁이 많은 어린아이 같아 그 늪으로 따라갈 용기가 없다

 

붉은 소나무가 立春大吉 쓰고 있다 / 정연희

 

붉은 소나무가 병이 들었다
한 아름이 되는 그 붉은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잎이 시들어 베어냈다
베어진 붉은 소나무가 제 몸에 글씨를 쓰고 있다
잘린 단면 그물코처럼 촘촘한 나이테 가운데부터
양쪽으로 한 획을 그었다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다 양끝으로 갈라지며 붓꼬리처럼 가늘어졌다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큰 大자가 맞다
立春大吉
봄을 기다리며 마음에 새기고 있다
붉은 소나무가 푸르던 제 몸의 기억을 복원하고 있다
입춘대길의 大자를 지금 막 써내려갔다
거칠게 잘려진 단면에 스스로 써놓은 큰 大자
아무래도 저 붉은 소나무는 큰사람이 되고 싶거나
집의 대들보가 되고 싶었나보다
병들어 일어설 수 없게 되자 다시 설 수 있기를
붉은 가슴에 大자를 새겨놓고 기다리고 있다

 

문득 내 손에 立春大吉을 써 주는 붉은 소나무의 손을 잡았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회 수주문학상 당선작들  (0) 2007.09.10
주름 / 배영옥  (0) 2007.09.07
김병호 시모음  (0) 2007.09.05
2007 실천문학 신인상 시부분 당선작 / 최정진  (0) 2007.09.03
찔레꽃 / 송찬호  (0) 2007.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