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병호 시모음 본문
1971년 전남 광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7년 <월간문학> 신인상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6년 시집 <달안을 걷다> 천년의시작
강가의 묘석(墓石)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리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개짓을 한다
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옮아피는 앙상한 길
내 몸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묘석(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환한 길 하나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호랑이로 복숭아로 꽃뱀으로
깜깜한 길을 내달은 아이를
홍제동 비탈길 검은 가지의 감꽃들이
환히 비춘다
내가 잠시 우주의 저녁이었을 때
한 숨 한 숨
거닐었던 숨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고
내가 다시 바다의 새벽이었을 때
한 눈 한 눈
몸 비벼 만든 종소리들이 아침을 이끌었듯이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냉이국
가로등은 깜박, 깜박 얇은 잠을 뒤척이고
담배가게 용길이 할머니도
난로가에 앉아 선잠을 데우십니다
젊은 아버지 퇴근길의 휘파람처럼
눈발이 골목을 길게 휘감으며
어깨 좁은 이웃들의 안부를 묻는 저녁입니다
어머니 시집올 때 해오셨다는
자개상 위에서 서둘러 맞는 저녁
아버지가 좋아하셨다는 냉이국을
두 쌍의 수저가 어깨 세워 사이좋게
달그락거리고, 바닥에 가라앉은 뿌리마저 훌
훌 들여마시면, 한 그릇으로도 가득 넘치는
봄, 난 아버지의 봄마저 마십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 마당 한 쪽에
싸륵싸륵 눈 쌓이는 소리로 안부를 전하면
꽃시절 그리운 어머니는
먼 나라로 길을 나서듯 뜨개질을 하시는데
조개껍질 안으로 영겁을 지낸 순한 짐승들이 날고
꽃구름 사이로 볼 붉은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먼 나라에서 어깨 나란히 걷는
하이칼라의 젊은 아버지와
하이힐, 나팔바지의 어머니
밤이 깊을 수록 아버지의 안부는 선명해지고
어머니는 미닫이에 걸린 달빛으로
한 땀 한 땀 봄을 깁고
내일쯤 나는
다시, 젊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습니다
오래된 집
남자는
돌아갈 먼 길을 생각하는데,
한숨이 움파처럼 돋아난
감또개 그늘 안에서
여자는
종일 항아리를 씻었다
+ 감또개 :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달 안을 걷다
내가 한 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바늘 돋은 혀로 말간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그믐 모양으로 흐르던 푸른 수맥의 흔적
그 사이로 비늘 떨군 물고기가
해질녘 주름진 빛과 몸 바꿔 흐를 때
내가 제일 나중에 지녔던 울음과
몸담아 흐른 기억마다에 피는 상여꽃
봄을 앓는 어머니가 누이의 머리채를 흔들고
꽃뱀이 누이의 다리를 휘감는다
한참 누이를 사랑하던 꽃뱀은
은사시나무로 다시 몸을 바꾸고
아버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으로 나가
허리를 꺾는다
어머니는 누이를 향해 자꾸만 손나비를 날리는데
검은 살의 물고기들이 달려와 은사시잎을 뜯는다
아버지는 자정의 종소리로 울리고
달빛 속의 누이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바람을 읽으면 별이 될 수 있을까
잎 큰 나무들이 바람을 모아
제 안에 나이테를 그려놓고
잎 떨군 나는,
눈 먼 새들의 울음을 모아 내 몸을 헹군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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