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신동엽 시모음 본문
신동엽(申東曄) 1930~1969
193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전주 사범, 단국대 사학과,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1963년 시집 [阿斯女] 간행
1967년 서사시 [錦江] 발표
1969년 간암으로 별세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나의 나
사양들 마시고
지나 오가시라
없는 듯 비워둔 나의 자리.
와, 춤 노래 니겨
싶으신 대로 디뎌 사시라.
한물 웃음떼 돌아가면
나 죽은 채로 눈망울 열어
갈겨진 이마 가슴과 허리
황량한 겨울 벌판 돌아보련다.
해와 눈보라와 사랑과 주문(呪文),
이 자리 못 물고
굴러떨어져 갔음은
아직도 내 봉우리 치솟은 탓이었노니.
글면 또 허물으련다
세상보다,
백짓장 하나만큼 낮은 자리에
나의 나
없는 듯 누워.
고이 천만년 내어주련마.
사랑과 미움 어울려 물 익도록.
바람에 바람이 섞여 살도록.
강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강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비에 배어
가랭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넝울처럼 물결에
쓰러져 버리더라 둥둥 떠내려 가는 시체 물 속에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 소리를 내며
혀를 묻어 내놓더라.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들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똟어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며,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
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
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 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 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진달래 산천(山川)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조선일보, 1959.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