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스크랩] 1분 5초 짜리 인내심 / 김현희 본문
1분 5초 짜리 인내심 / 김현희 우리 아파트 앞 건널목에는 조그만 신호등이 있다. 평소 전철역을 갈 때나 마트나 은행, 그리고 공원에 산책하러 갈 때도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족히 서너 번은 지나다니는 그런 신호등이다. 나는 이 앞에만 서면 종종 조바심을 느낀다. 약속시간에 삼십분 정도는 무리 없이 기다려주는 그리 참을성이 없는 성격도 아니건만, 어쩐 일인지 이 신호등 앞에만 서면 나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라 더 유혹적인지도 모르겠다. 때론 곧 초록불로 바뀌는 행운으로 건너갈 때도 있지만, 대개 조금 더 기다려야 하거나, 아님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빨간불로 바뀌는 불운으로 다시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 온전히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땐 왠지 억울한 기분까지 든다. 이렇게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양 하는 신호등의 대기시간이, 도대체 몇 분인지 궁금하여 한번은 시간을 재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1분 5초, 즉 65초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정도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돈하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인내'라는 두 글자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꽤나 필요한 단어인 것 같다. 웬만한 일에 인내심이란 것을 발휘하면, 나중에 후회할 일은 훨씬 줄어든다. 어떤 사건 앞이나, 또는 인간관계에서. 간혹 상대방에게 목소리가 높아져 갈 경우에도 잠시 호흡을 고르고 한 박자만 쉬면, 나중에 자신에게 칭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지 않던가. 그런 경우가 생기면 자신에게 이야기하고는 한다. ‘한 박자만 늦게, 한 번만 더 생각하기’ 간혹 자그마한 일에 침착성을 잃기도 하지만, 차라리 큰일에는 비교적 인내심도 있고 의연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문득 나의 결혼식 날이 떠오른다. 결혼식, 그 날은 비 오다 그친 휴일의 오후였다. 신부화장으로 준비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선택해둔 드레스를 가져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교통체증 탓인지, 직원이 드레스 숍에서 출발했다 하는데도 도착할 기미가 없는 것이었다. 시계바늘은 어김없이 결혼식 시각으로 줄달음치는데, 한껏 곱게 매만진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만 갔다. 대기실에서는 신부가 왜 빨리 오지 않는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주위사람들도 속이 많이 탔나보다. 나또한 손바닥에는 땀이 고이고 있었지만 발끝으로 연신 힘을 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그 옷이 도착한 시각은 결혼식 시작시각이 임박해서였다. 급히 드레스를 입혀주는 직원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 직원인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리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지 미안해서 그랬는지 이렇게 침착한 신부는 처음 봤다는 말을 했다. 물론 나도 속으로 연신 호흡을 고르는 중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 리가 없었다. 더욱이 촉박한 그 상황에 칭찬의 답례로 미소까지 지어주는 여유를 부렸으니 말이다. 결국 신부대기실에서의 사진은 한 장밖에 못 찍었지만, 그날의 장면은 오랫동안 나에게 대견함으로 남아있다. 또 하나는 오래전 여름방학 때였다. 직장동료들과 남해의 아버지 양식장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로 회를 맛있게 먹고 저녁 무렵쯤 되었을까. 몸이 조금씩 가렵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니 몸에 좁쌀만한 알갱이가 하나씩 돋기 시작하여 점점 번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특이체질이라 멍게를 먹을 때, 가끔씩 두드러기가 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선회와 같이 몇 점 먹은 멍게생각이 났다. 어찌하겠는가. 두드러기는 온몸으로 퍼져 더욱 가렵기만 하고, 심해질까 긁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그날의 가려움은 내가 가진 인내이상을 요구하는 고통이었다. 친한 동료가 보다 못해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라고 했다. 그런데 본채에 계신 아버지인들, 그 한밤중 외딴 섬에서 무슨 방도가 있으시겠는가. 어차피 아셔도 나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거니와, 그 걱정으로 아침 배 운항시각까지 제대로 잠도 못 주무실 건 뻔한 일인데. 나는 말씀드리지 않도록 부탁을 하고, 별채아래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닷물 속으로 여러 번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혹여 소금물로 씻어주면 가려움이 덜할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그 가려움을 참느라고, 그리고 여행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괜찮은 척하느라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도 나에게는 인내심을 추억하는 좋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큰일에는 그리 인내할 수 있었건만, 오늘은 못나게도 짧은 신호등 앞에 이리 흔들리며 서 있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감추어진 진짜 나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건널까... 아니, 기다릴까...’ 나는 오늘도 예외 없이, 기껏 1분 5초짜리 인내심에 이렇게 시험 당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블로그 > 거울 | 글쓴이 : 거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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