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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업힌 날 / 고정욱

휘수 Hwisu 2006. 1. 5. 10:07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업힌 날 / 고정욱(소설가.아동문학가) 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 업고 1학년 15반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던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우, 우리 아들이 몸이 불편해서......" 숨 가쁜 어머니의 말에 당황한 선생님은 나를 황급히 맨앞자리에 앉게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장애로 인해 많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어야만 했다. 지금은 사라진 질병, 소아마비.
    그 바이러스가 내 몸을 공격한 것은 돌 무렵이었다.
    걷진 못해도 제법 다리에 힘을 줄 수 있던 내가 어느 날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내 몸통을 잡고 세워보니 발에 힘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서는 급성회백수염,
    소위 어린이들이 잘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소아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업고 전국 방방곡곡,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녔다.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구해 먹이며
    어머니는 내 몸을 고쳐보려 애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그때부터 나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혼자 힘으로 서지도 못하고,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해 까딱하면 사람 구실 못할 위기에 빠진 장애인,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주위에서는 그런 나를 갖다 버리라고 했단다.
    먹고살기가 그만치 어렵던 시절,
    나 같은 장애아는 외국으로 입양을 가거나
    수용시설에 팽개쳐져 짐승처럼 사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는 자식을 내다버릴 거면 차라리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나를 키웠다.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넘긴 나의 첫 번째 위기였다. 두 번째 위기는 학교를 입학할 때 왔다.
    혼자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내가 학교를 다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은 집은 나 같은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일반학교에서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놀림과 차별,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을 부모들이 못 견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집은 그럴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선택은 일반학교를 다니느냐 마느냐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매일 업어서 다니겠노라고 결심하셨고,
    나는 동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어머니는 아침에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놓은 뒤 학교가 파할 무렵,
    학교에 와서 날 업고 집에 왔다.
    그러다 고학년이 되어 도시락을 싸가게 되자
    나에게 찬밥을 먹일 수 없다며 직접 밥을 해서 점심 때 한 번 더 오셨다. 하루에 세 번을 아들을 위해 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다른 아이들이 찬 도시락을 먹느라 목이 메는 것을 보고는 다음날부터 커다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 들고 오셨다.
    아이들의 양은 도시락 뚜껑에 어머니는 일일이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오로지 장애가 있는 아들이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공부하고
    커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다행히 중학교부터는 내가 발목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오래도록 이어진 피나는 훈련의 결과였다.
    마침내 어머니의 무거운 짐인 내가 스스로 어머니의 등에서 내려온 거였다.
    중학교에서는 1층에 교실을 배정받아 별 어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첫날 입학식을 마치자,
    모든 학생에게 배정받은 반으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규율이 바짝 든 신입생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각자의 반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내 손에 쥐어진 배정표는 1학년 15반, 4층 꼭대기 교실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덩치가 커진 나에게 아무 망설임 없이 등을 댔다.
    머니의 등에 업힌 나는 손으로 목발 드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이미 조용해진 교사 계단을 어머니는 한 칸씩 힘겹게 올라갔다.
    울컥 내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 나는 장애인이 되어서 이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키나.'
    '이런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나.'
    대상을 알지 못할 분노가 내 어린 뇌리에 가득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벗어버릴 수 없는 숙명처럼
    나를 업고 2층, 3층, 4층을 차례로 올랐다.
    어머니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어렴풋한 각오였을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종례가 끝나자 다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건 무리네요.
    내일은 아래층 교실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나는 1학년 3반으로 배정이 바뀌었다.
    2층에 있는 반이었다. 나 대신 한 아이가 15반으로 가방을 싸서 올라갔다.
    그 후 나는 계단 오르는 법을 익혀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덕에 내 손바닥은 목발을 짚느라 온통 굳은 살이 박였지만
    어머니의 등에 다시 업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기만 했다. 흔히 사람들은 불편한 턱과 계단 앞에서
    장애인을 업어주거나 들고 나는 것이 가장 간단한,
    그러면서 인간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적절한 편의시설만 갖춰진다면 장애인 대부분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장애인이 원하는 바다.
    남의 도움을 매일 받으며
    "미안하다" "고맙다"를 입에 달고 다니며 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나는 독립적인 장애인으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내 가족을 부양하는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강인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나에게 보여준 어머니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다. 아, 빠뜨린 게 있다. 나는 그런 어머니 덕에 초.중.고 12년 내내 개근 상을 받았다. -어머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중에서-

 
출처 : 블로그 > 들꽃 향기 | 글쓴이 : 세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