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류외향 시모음 본문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1999년 계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꿈꾸는 자는 유죄다』『푸른 손들의 꽃밭』
도고 도고역
거기 역이 있다 한다
지상의 끝에 있을 것 같은 역이
거기 있다 한다
열꽃이 미친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더운 잠에 빠져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거나 지나친 줄도 모르거나
철로의 행선지를 도무지 알 수 없거나
열차를 탄 채 제가 승객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도고 도고역
그의 혼에 이끌리듯 내려선다 한다
내려서자마자 주춤 발을 물린다 한다
전생의 새벽이 회색 바람에 묶여 와글와글 몰려오고
열차 떠난 자리엔 철로만 남아
수억만 년을 요지부동 엎드려 있었다는
완강한 자세로 철로만 남아
내릴 수는 있어도 탈 수는 없는 도고 도고역
회색 바람을 타고
서릿발 툭툭 털어내며 한 남자 걸어와
잿빛 양복을 펄럭이며 꿈결처럼 걸어와
눈자위 붉게 빛내며
천년만년 같이 살자 말을 건넨다 한다
그 말 하 심상해서
한 남자 소맷자락을 잡고 따라가
눌러 살고 싶어진다고 한다
멀리 드문드문 더운 김을 뿜어내는 산야와
뒤돌아보면 긴 꼬리를 땅속으로 뻗으며
요지부동 엎드려 있는 시간의 무덤들
약속도 없이 저 혼자 덜컹철컹
문을 열었다 닫는다 한다
거기 역이 있다 한다
생의 기척에 무감해 천근만근 무거운
잠 속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을 때
그 역에 내릴 수 있다 한다
빈 들
들판의 묵시록을 보았다
썩은 물웅덩이에 뿌리를 담그고 몸을 누이다 못해
머리까지 거꾸로 처박은 채
여름 지나고 가을 지나고
겨울의 초입에서 들판은 통째로 갈아엎었다
너무 오래 서 있었다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미안하다 내 몸이여
식어버린 저 바람에 한 점 한 점 흩어져
우리 살아온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야 하리
우리에겐 거듭날 이승이 남아 있지 않으니
시큰거리는 무릎을 내던지고
전언 없는 하늘에 제를 올리리
지뢰밭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인 하늘
더욱 많은 뇌관들이 떠다닐 것이다
아, 이 빈 들의 꺼져가는 숨인 듯
새들 먼 공중을 가뭇가뭇 날아가고
서둘러 떠나는 그 길마저 어지럽히며
미군 헬기 밤낮으로 떠다닌다
들판은 이제 생각을 멈추었다
언젠가 먼 후손들이 살비듬내 풍기는
낱알들의 퇴적암을 발견할 것이다
스스로 제 몸을 풍장시킨 이 들판의
최후의 생각 한 줌 보게 될 것이다
풍림모텔
사철탕집이 즐비한 그 골목엔 풍림모텔이 있다 들녘을 달려온 바람이 모텔 외벽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골목 어귀를 돌아나가지 못할 때 그땐 이미 사철탕집의 지붕 너머로 붉은 달이 떠오른 뒤였다 마른 어둠이 몸 뒤채는 소리가 깊어질 때 나는 풍림모텔로 들어갔다 한 그루 은행나무의 손을 잡은 채였다 수천 년을 걸어 그에게로 갔다 오체투지로 다가가 그녀의 속살을 더듬어 물기 마른 나이테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 손이 그의 허리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일찍 태어난 잎들이 침대 위로 떨어져 내렸고 커튼을 젖히고 들어온 바람이 그 잎들 위를 자분자분 걸어다녔다 그의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전생과 후생의 언어들이 비밀스럽게 내 귓바퀴를 간지럽혔고 우수수 일어선 잎들이 공중을 떠다녔다 잎들의 소용돌이, 푸른 블랙홀 속에서 우리는 전율했다 사철탕집 지붕 너머에서 미열 같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풍림모텔을 나왔다 한 그루 은행나무와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우리를 따라나온 바람이 골목 어귀를 휘몰아쳐 갔다 내 몸에 잎이 돋고 있었다
출처, 푸른시의방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물방울들은 / 나희덕 (0) | 2007.11.21 |
---|---|
불온은 손가락이 길다 / 최을원 (0) | 2007.11.21 |
[스크랩] 황병승의 시 (0) | 2007.11.19 |
우물 / 신용목 (0) | 2007.11.16 |
김근 시모음 (0) | 2007.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