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스크랩] 연암을 다시 본다 본문
연암의 문체는 불온하다. 그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던 가치를 거부했다.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고, 바꾸어 보았다. 듣고 나면 당연하고 생각해 보면 지당한데,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늘 금기를 건드렸다. 알면서도 입 다물고 싶어 하던 생각을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연암이 글을 한 편 발표할 때마다 젊은 문사들이 술렁거렸다. 그 생각의 진취성에 움찔했고, 발상의 참신함에 열광했다. 그들은 환호하며 연암을 뒤따랐다. 그 말투를 흉내내고, 그 생각에 동조했다. 정조는 그의 문체가 지닌 불온성을 진작에 간파했다. 그래서 그가 빼든 카드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를 바르게 되돌려 놓음으로써 지식인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과연 동서고금 어떤 임금이 문체를 카드로 내세워 사회 기강을 확립하겠다고 나선 경우가 있었던가?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의 중심에 연암이 있었다. 한 사람의 문체가 지닌 파괴력이 이토록 의미심장했던 예를 달리 찾기가 어렵다. 연암의 글은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펄펄 살아있다. 200년도 더 된 옛글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지금 코앞의 현실에다 대고 날리는 직격탄처럼 읽힌다. 그때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읽는 사람을 격동케 하고, 눈과 귀가 번쩍 뜨이게 한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 같다. 그는 치고 빠지는데 명수다. 묵직하니 걸렸다 싶은데 건져 올리고 나면 바람처럼 그물을 빠져 나간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재미있고 경쾌하다. 재미있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오리무중이다. 연암 문장의 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가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은 시대의 터부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그는 빗대어 말하기의 명수다. 길 가다 눈을 뜨는 바람에 제 집을 못 찾고 울고 있는 장님에게 그는 “도로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평생 장님 주제로 살란 말이 아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 기본 좌표축을 설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서구 이론에 붙들려 주체를 돌아볼 겨를이 없던 우리가 이 우화를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귀울음과 코골기에 현혹되고, 짝짝이 신발을 신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코끼리를 통해본 기호의 의미, 밤중에 강물을 건너며 귀와 눈이 지어내는 헛소문의 세계에 대해 들이대는 그의 날카로운 해부.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참신하고, 예리하고 또 통렬한가! 그는 돌려서 말하고 비유로 말하지만, 비겁하게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글자는 병사요, 제목은 적국이며, 주제는 장수와 같다. 병법과의 유사성을 통해 글쓰기의 핵심을 찌르는 그 놀라운 통찰력하며, 나뭇단을 지고서 ‘소금 사려!’ 하는 식의 글을 쓰지 말라는 매서운 질책은 한문 문장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언컨대 그의 몇 편 글만 제대로 읽으면 오늘날 논술교육이 다 쓸데없게 된다. 그는 무겁지도 않고, 더더구나 가볍지도 않다. 그는 ‘지금 여기’를 살면서 ‘그때 거기’나 ‘지금 저기’만 기웃대는 현실을 답답해했다. 우리가 우리 것을 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외쳤다. 고전이 되려면 옛것을 흉내 내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때로 그의 외침은 절규로 들린다. 그가 느꼈던 답답함은 지금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그의 글 속에는 움베르토 에코도 있고 루쉰도 있다. 그의 글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유효한 까닭이다.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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