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송유미 시모음 본문
심싱 신인상
중앙대학원 예술대학원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못을 박으며
세상은 자꾸 희미해진다. 내가 박아온 진실들이 일제히 튕겨나오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슬픔들이 반란을 시작한다. 구부러진 못처럼 쓸모없는 정의들이 또다시 하늘 속으로 날아가고 하늘은 시뻘건 녹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다.
내가 가진 망치로 정확히 못을 박을 수 없는 삐걱거리는 일이 일어나고 내가 지어논 집들이 한 순간 무너지고 만다. 다시 일으켜 세우기까지 오랜 세월을 요하는 소중한 꿈과 진실들이 흩어지고 바람에 흩어지고 꽝꽝 대못을 박으며 십자가에 대못을 박으며 어쩔 수 없는 겨울비에 울고 있다.
갈증이 난다. 그대 가슴에 아픔도 없이 내리치던 욕설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의 불빛에 못을 박으며 설움의 못을 박으며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본다. 내가 지켜온 이유 없는 질서와 자유 일제히 녹이 슬어 흘러내린다.
이제 나는 어디서부터 새로이 못을 박으며 나의 자리를 지켜나가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물의 나라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이 무심한 길을 버리고
그대 사는 비취빛 호수에 닿아 수초도 키우며
보라빛 옥잠화도
키우며
귀여운 아이같은 붕어떼를 키우며
억만년쯤 머무르다 흐르고 싶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환한 등불이 되어주면
쓰다만
시를 쓰고
낮이면 환한 햇살이 스며들어 꿈의 프리즘을 이루는
이 아름다운 감옥에서
뜨다만 그대의 옷을 짜고 싶다
내 힘모아 달려온 모든 길이
내 열어둔 모든 그리움의 문들이
한 순간 발목에 잡혀
영원히 흐를 수 없더라도
늘
깨어 아프게 흐르던 그 절망까지도
이제는 그대 맑은 눈빛 하나 담고서
고요히 흐르는 거울이고 싶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누룽지가 붙어서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 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 번 비우지 못해
청정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묻은 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못박는 아버지
전쟁과 혁명을 좋아하던 아버지
군복을 벗자 떠돌이 도편수가 되었다
생생한 못 하나면 전국 지도에 방점 찍던 아버지
이제는
고충아파트 벽에 걸린 액자 속에 산다
그래도 한시절 떠돌이 도편수로 이름을 날렸는지
주막집 여자에게 돈만 떼이고 나를 얻은
아버지
그 뜯어내기 어려운 生들은 못질하고 대패질 하시는지
액자 속에서 더 노랗게 늙어버렸다
남의 가슴에 못질하던 니 가슴에도
못이 박히는 거여
대낮에도 액자 속에서 잔못질처럼 중얼거리는 아버지,
반평생 남짓은 못질로만 살았을 것인데,
그래도 무슨 못이
그리 남은 것인지
당신 손으로 꽁꽝 박은 棺 속으로 떠나던 아버지,
꽃상여 메고 가는 아들딸들도
다 다른 구멍에
박아서
자식끼리도, 가슴에 대못을 박게 하던 아버지,
이제는 못 박힌 액자 속을 떠나시는지
벽에 걸린 헐거운 못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