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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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시모음

휘수 Hwisu 2006. 6. 29. 00:59

1998년 6월 <예술세계> 신인상 등단
계간문예 <다층> 편집동인

 

열린 감옥


지구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經典은 나를 비껴 지나갔다.

파래서 너무 파래서 확 갈기고 싶은 하늘 아래

나는 치명적으로 젊고 건강하다.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져 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바닥論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 하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 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3월, 그 동백나무


 폭죽처럼 날리던 하얀 눈발이 네 머리 위에 가슴 위에 구두 위에 악세사리처럼 빛나고 있었어. 그 겨울, 너의 푸른 외투, 주머니 속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오도카니 서 있던 너. 네 어깨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도 하얀 눈이 쌓이고. 넌 밀랍인형처럼 내 눈빛을 무심히 받아내고 있었지. 나는 <너>라는 길고 긴 겨울을 은밀하게 건너고.
내 늑골 속 그녀가 던져준 거머리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내 가슴은 염장미역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어. 현기증이 병처럼 깊어가던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왔어. 환상처럼 그녀가 왔던 거야. 난 그때서야 비로소 봄을 맞이할 수 있었지. 봄의 빗장을 쥐고 있던 그녀. 나의 계절은 그녀로 인해 열리고 닫히던, 아름다운 형벌의 시절이었어. 창문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목, 난 용수철처럼 튀어나갔지.
 아! <너>라는 추억에 나를 가두고, 내 늑골 사이에 길을 내던, 그녀가 거기 서 있었어. 비스듬하게 서 있는 그녀의 하얀 손등에 파란 정맥이 투명하게 흐르고 있었어. 내 늑골 속으로도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어. 눈이 쌓였던 그 머리와 어깨, 그리고 그 푸른 외투에 대한 기억도 그대로인데 비스듬히 몸을 튼 그녀의 옆얼굴은 뭔가 비밀스러워 보였어. 그때였어. 짓궂게 불어대던 바람 속에 봉긋 드러난 가슴, 분홍색 브레지어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그날, 그 해 봄날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지.

 

창 밖, 저 동백나무.


이불

 

아이 둘 순산한 내 몸엔 늘 찬 기운이 돈다.
마음의 온기도 차츰 빠져나가고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곧 중학생이 될 아들 녀석이 내 배 위에 찰싹 옮아붙는다.
녀석의 어리광이 때때로 나를 귀찮게도 하지만
제 몸과 내 몸이, 제 피와 내 피가 서로 부르는 걸
아무도 벌려놓을 수 없는 이 간격을 어쩔텐가.
아들의 몸무게와 온기가 내 몸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온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견딜만한 무게와
가장 따뜻한 온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아 따뜻해, 너도 따뜻하냐
내 평생 이렇게 너를 덮고 살련다
너는 내 살과 피로 부풀려 만든 이불 아니겠냐
이 세상에 너 만한 온기가 어디 또 있겠냐
끝까지 나를 덮어다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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