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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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솔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2. 09:49

1971년 제주 출생.(본명 박미경)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중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옴

2001년 <현대시>신인상

시집 <달의 영토> 2006년 문학사상

현재 오산대학 강사

  

안개의 발바닥은 왜 검은가

 

 강가에 어스름이 밀려올 무렵
 사람들이 흘려보낸 물소리가 안개가 되어 흐르네
 그 안개 속, 도시의 잊혀진 이야기가
 물비늘로 밀려와 강기슭에 쌓여가네

 

 검은 근육질의 강 속에 토사물이 함께 흐르고
 낡은 슬리퍼 한 짝을 삼켰다가 뱉으며
 도시의 검은 부유물들을 울컥울컥 토해놓는 강물과
 그것들을 가만히 감싸 안는 안개가 물의 유목을 몰고
 강의 하류 쪽으로 흘러가네
 
 긴 도시의 강을 업고 온 안개의 발바닥이 너덜거리고
 미세한 혈관들이 터져 얽혀 있던 길들이 쏟아지네
 안개의 발밑 평온해 보이는 강물 속에
 먼 곳에서 흘러든 부음들이 하나 둘 젖은 몸을 뒤척이고
 사람들의 검은 울음이 불씨를 숨긴 채 꺼져가네

 

 나는 안개에 떠밀려온 깊은 물소리를 듣고 있네
 오래 전 강가를 떠돌던 사람들에게
 물소리 외피를 벗겨 물결의 안부를 띄우네
 누군가 던져 넣은 슬픔 속으로
 안개의 발이 빠지는 것을 보았네
 안개의 검은 발바닥을 보았네

 

말뚝에 대한 기억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새끼들과 장난을 치는
어미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 있다
아카시아나무 잎사귀에 부딪혀서 급강하하는
햇살의 칼날, 소의 몸통이 무수히 조각난다
아버지 약값을 위해 소를 팔던 날
외양간을 나서는 소의 깊은 눈망울 앞에서
후줄근한 몸뻬 차림의 어머니가 휘청거린다
다음 생엔 네가 내 주인이 되어 만나자꾸나
자꾸만 머뭇거리며 고삐를 넘겨주지 못하는
제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미 소가 어머니의 손등을 핥아준다
고삐를 잡은 손이 위태롭게 허공을 향한다
무딘 날을 세워 굳은 땅을 갈아엎던 고집으로
무너지는 일가를 지탱해온 어머니,
어머니가 내준 길을 따라 어미 소가 트럭에 오르고
철제문이 소의 그림자를 가두자,
젖을 갓 뗀 새끼, 어미 소를 향해 울음을 내지른다
트럭의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햇살에 잘린 붉은 파편들이 궤도 밖을 뒹군다
트럭이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말뚝처럼 박혀 있다

  

달의 영토


 모두들 잠든 시간, 서늘하게 걸려 있는
 저 달은 우주로 귀환하지 못한
 영혼들의 오랜 영토가 아니었을까
 남겨진 이들이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갈라진 논바닥처럼 가슴이 타들어갈 때,
 달에 스민 영혼들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상을 내려다본다, 저 영토에도
 개울이 흐르고 새가 날고
 창백한 영혼들이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
 지상에서의 한때처럼 둥근 숟가락질을 하겠지
 먹구름이 달의 주위를 감싸고돈다
 사자死者들의 영토에 밤이 도래한다
 창가를 비추던 달빛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기억을 쓸던 달빛도 순간 사라지지만
 내 기억 속 한 사람이 상흔처럼 되살아난다
 그는 지금 저 영토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지만
 한때 그의 중심에 박아놓은 수많은 옹이들
 이젠 어떤 참회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내 안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힐 때까지
 달의 안부를 오래도록 묻고 있다

 

텅 빈 마늘에 대하여

 

 벽에 걸어둔 육쪽 마늘 속에는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여자 속에는
 머리채를 휘날리며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이 있다
 팽팽하던 껍질은 조금씩 메말라가고
 여자는 매일 제 안의 불길로 온몸을 태운다
 불길을 뚫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콩새 한 마리
 꽁지 짓을 하며 날아간 그 자리
 빨갛게 살아나는 흔적
 불꽃을 숨긴 여자가
 다용도실 한쪽 벽에 걸려
 제 불길에 제 몸을 태우며 말라가고 있다


    이 지나간 자리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앉히고 불을 켠다. 컴컴한 불구멍에서 파란 불꽃이 치솟는다. 내 안, 구석진 곳에 숨어 있던 뱀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 나온다. 불꽃이 냄비에 얼굴을 부비는 동안, 징그러운 몸뚱이를 말아 올린 뱀이 내 안에서 똬리를 푼다.


 
 냄비 뚜껑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냄비 뚜껑 사이로 벌건 국물이 흘러나온다. 느리게 몸속을 유영하던 뱀이 빠른 속도로 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냄비 뚜껑이 들썩임을 멈추지 않는다. 내 청춘은 달궈진 양은 냄비 같은 것이었다. 끓어오르는 순간 넘쳐버리는, 넘친 국물이 내 안의 바닥을 얼룩지게 하던,

 

 가스레인지 바닥에 벌건 흉터를 만들고서야 불꽃을 줄인다. 파란 불꽃이 냄비의 아랫도리를 은근하게 쓸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나는 늘 적당한 불꽃을 맞추지 못했다. 아직 뜨거운 냄비 속에서 뱀이 제 꽃잎들을 뭉개고 있다. 꽃잎들이 소리 없이 짓이겨진다. 내 몸을 달구던 마지막 불을 끈다. 불꽃이 냄비를 잊고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힘이 다한 뱀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내 안 오래 뜸 들인 어둠 속으로 뱀이 사라져간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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