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문학과창작 2006년 신인상 수상작 / 정재록 본문
기둥들은 다 힘이 좋다
구리 기둥이 보덕암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다
구리 기둥의 손바닥이 부처님의 가부좌를 받들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외통수로 박힌 구리 기둥 위에
달랑 올라앉으면 부처님이라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나를 당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번쩍 공중에 띄워 올려
둥개둥개 까불리던 아버지의
힘줄 툭툭 불거진 팔뚝을 생각한다
좋아서 까르르 자지러지면서도 내 여린 종아리에
짱짱하게 힘이 박히던 걸 생각한다
가파른 생의 언덕을 오르면서 늘 숨가빴을 아버지
당신이 나를 힘줄 툭툭 불거지게 지탱해준 만큼
나도 짱짱하게 버티면서 하늘만큼 일어섰던 것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아버지를 내가 믿었기에
나도 당신의 손바닥 위에서 짱짱하게 버틸 수 있었다
당신의 힘줄 툭툭 불거진 팔뚝이
나를 지탱해 줄 거라는 내 믿음과
내가 당신의 손바닥 위에서 짱짱하게 버텨줄 거라는
아버지의 믿음이 서로를 수백 년 지탱해 오고 있다
내 손바닥 위에서 내 아이가 놀고 있다
생의 가풀막에 세워진 구리 기둥 위에서.
감각의 무늬
통영 어시장에서 가자미 좌판을 하는
김서분 여사의 지문이 뭉개진 손을 보았다
나이 오십에 손등이 건어물처럼 트고
검버섯이 무성하게 핀 손으로 가자미를 팔고 있다
삼십 년도 넘게 수백만의 가자미들이 지문을 묻혀갔다
팔아도 팔아도 서분하기만한 가자미들에게서
수백만 번 간이 밴 손가락마다엔
가죽을 덧댄 것처럼 굳은살이 박혔다
아, 살도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면 닳는구나
통영 어시장에서 가자미 좌판을 하는
김서분 여사의 손을 보니 알겠다
서분타, 서운타, 살이 닳고 지문이 닳을 때,
얼마나 생의 저 바닥 층에 가라앉은 감각이
그립겠는가를
나는 희고 곱상한 손이 부끄러워져
얼른 포켓에 찌르고 돌아선다.
까치설날의 떡메질은 신명난다
불땀 좋은 장작불에 갓 쪄낸 떡쌀을
나무절구에 시루째 쏟아붓고 퍽, 퍽 떡메를 날린다
시루 속에서 뼈가 무른 떡쌀,
뼈가 무르는 시루 속 뜨거움을 함께 나눈 떡쌀들
꼬들꼬들 고개 쳐들고 있다가
떡메질에 납작 주저앉아 까무룩 정신을 놓는다
떡메질을 피한 놈들이 몸을 한데 모아
맞은 놈들을 얼른 감싸 안고 저희들이 대신 떡메를 맞아준다
어차피 돌아갈 매이건만,
서로 번갈아 맞아주고 몸을 막아주면서
너도나도 으스러져 서로 엉겨 붙는다
하늘에서 성글게 날리는 눈송이들도 하나 둘 거기에
몸을 보탠다
얻어맞을수록 차지게 한 몸이 되어가는 떡쌀 형제들
너도 나도 어깨를 겯고
달 항아리로 떠올라
떡판을 가득 메운 대동세상
눈보다 하얀 떡을 온 세상에 나눠주리.
꽃 등신불
선암사 대웅전 뒤란에서 철쭉을 본다
진분홍 색 하나로 법열이 철철 넘치고 있다
그렇지, 색은 몸으로 터득하는 도가 아니던가
色자 화두 하나 받들고 동안거에 들었던 것이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독경소리에도
오직 色자 하나만 귀에 꼭꼭 들어와 박히던 거였다
색을 끊으려 하면 할수록 색은 단전을 거쳐
심장을 지나 정수리까지 차오르던 거였다
저 단전에서부터 색을 밀어올리는 것이다
밀리고 밀려서 왈칵 넘쳐버린 색의 이 고인 물
깨달음이 어찌 저 혼자만이 누리는 화엄세계일 것인가
네 안에서 박차고 나온 색을 남김없이 비워
그 농염한 진분홍으로 세상을 가득 채워라
네 몸을 진분홍 꽃잎으로 터뜨려
중생의 허랑한 영혼을 색으로 가득 메워라
사람마다 진분홍의 황홀경을 눈뜨게 하라
절집의 뒤란에 철쭉을 심어 색을 밝히는 뜻
내 몸에 너의 색을 받아들여
내 무명빛 영혼을 짙게 물들이고 싶다.
자작나무 음반
눈이 오는 날, 목공 선반에 둥근 나무그릇 본을 걸고
음악을 듣는다
엘피판에 바늘을 얹듯 빙빙 돌아가는 나무그릇 본에
바이트의 칼날을 들이대자 나무가
알렉산드르 빠드볼로토프의 ‘하얀 자작나무’를 틀기 시작한다
함박눈 같은 노래가 내 마음의 자작나무 숲에 울려 퍼지고
칼끝에서 도르르 말려나오는 나무지저귀의 둥근 음표들
한겨울 자작나무 숲에 하얗게 날리는 음표들
나뭇가지 위에 소복소복 쌓여
나무가 제 몸에 둥글게 둥글게 소리를 입힌 나이테의 음악
(나무야 미안하고 고맙다)
둥글게 그릇 본을 떠내고 창고 마당에 버려진 파치들,
무더기를 이룬 통나무들도 신기한 듯
‘하얀 자작나무’의 선율에 귀를 연다
목공선반에 둥근 나무토막을 걸고 그릇을 깎는 일은
내 귀를 깎는 일이었다 세상 온갖 크고 작은 소리에
다져져 가죽처럼 질겨진 고막을
갈대청 같이 벼려 나무의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이제야 내 귀가 자작나무 숲에 눈 덮이는
소리를 한 그릇 소복이 담아낸다
잘 생긴 나무그릇 하나,
벽장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스토리문학관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서봉 시모음 1 (0) | 2006.11.25 |
---|---|
2006 문학과창작 작품상 수상작 / 고명수 (0) | 2006.11.24 |
이시하 시모음 (0) | 2006.11.23 |
너를 사랑 한다 / 강은교, 18회 정지용 문학상 (0) | 2006.11.23 |
우리 집에 왜 왔니 / 이시하, 제12회 지용문학상 당선작 (0) | 2006.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