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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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1. 23. 23:33

경기도 연천 출생

2005년 시와창작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시집 <푸른 生으로의 집착> 출간

제12회『정지용 문학상』신인상 수상   

 

나무 

 

    나무의 살을 물어뜯었다 질기고 텁텁하고 아릿했다 나무는 조용

히 햇살을 당겨 제 몸에 감았다 나무가 울지 않았으므로 나도 울지

 않았다 나는 우는 나무가 보고 싶었고 우는 나무 때문에 아프고 싶

었고 아파서 울고 싶었다


   햇살을 칭칭 동여맨 나무의 상처는 따스했다. 갓 태어난 병아리

처럼, 병아리 발자국 같은 개나리꽃처럼, 개나리꽃 피는 봄날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따스했다


   햇살을 온몸에 바른 나무는 하나님처럼 빛나더니 상처에서 연초

록 새싹이 돋아났다 내 잇몸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빨을 뚫고 나

무들이 자라났다 상처에서 자라난 새싹들이 입안으로 날아들자 나

무들이 뽑혔다 이빨도 함께 뽑혀나갔으므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

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한없이 울었

고 나무는 끝없이 웃었다

 
   춥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햇살이 온데간데없다 나무는 이제 웃

지 않았고 나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나무가 내 등에 기대어 졸기에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다보면 밤새 나무를 재워야하는,  이런 별

스런 날도 있는 것이다.

 

꽃무늬 포대기


엄마의 모든 것은 흐리고요
내 꽃무늬 포대기는 너무 낡았어요
한번쯤 붉게 피어나세요, 엄마


부지깽이 같은 엄마
자꾸만 닳아지는 숯검댕이 엄마
그런 엄마, 어부바해 줘요
어부바어부바 참 바보 같은 말이에요
낡은 포대기 같잖아요.
언니들이 물려준 젖내 나는 포대기가
어부바어부바 자장가를 불러요
지겹고 정다운 노래를 불러요


꽃처럼 피어나세요, 엄마
옷섶을 헤치고 마른 꽃 판을 쪽쪽 빨면
그러면 피어날 수 있나요
포대기에 그려진,
붉은 빛깔이었을 저 꽃의 이름이 무어여요?
해당화인지 장미인지 모를 저것이
활짝 피어나면 좋겠어요
조금만 더 붉었으면 좋겠어요


부지깽이가 다 닳아졌어요, 엄마
아빠는 새 부지깽일 다듬어요
별 다방 미스 정이 자꾸 외상값을 받으러 와요
빨간 장미가 그려진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요
껌을 짝짝 씹을 때마다 붉은 꽃들이 벌어져요


엄마가 포대기를 꿰매요
해당화인지 장미인지 모를 꽃잎 한쪽이
바늘에 쿡쿡 찔리고 있어요.
눈물이 나올 랑 말 랑, 짓무른 눈을 훔치며
해당화였을 거다, 해당화……
뻐끔뻐끔 말해 주었어요.

 

내 사랑, Miss 마네킹

 

나의 몸이 곧 나의 영혼!
맑은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내 속을 훑고 지나요
시시껄렁한 유머들로 입술을 달싹여요
은근살짝 연인의 어깨를 더듬어요


당신은 내가 이쁜가요?
표준 사이즈의 완벽한 여자, Miss 마네킹!
35, 24, 36, 섹시하지 않나요?
그대의 연인은 단지,
나의 빨간 실크 블라우스를 탐낼 뿐이에요


물론 알아요! 미스 마네킹
내가 밤마다 꿈꾸는 이상형은 바로 그대
속이 텅 빈 아름다운 그대
배신과 탐욕과 모욕을 모르는 그대
오오, 내 사랑, 마네킹!


(하지만 당신의 붉은 실크 블라우스를 벗겨야겠어요
울음 끝이 질긴, 붉은 잇몸의 내 애인을 위해!)


있잖아요……
속이 텅 빈 여자도 여자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요?
부질없는 생은 부질없이 살아야만 옳은 건가요?
네온사인이 저녁별을 다 밀어내도 아무 상관없나요?
낮보다 밝은 밤의 도시가 당신에겐 아름다운가요?


당신 눈에 혹, 속옷 코너가 보이진 않나요?
누가 내게 핑크빛 브래지어를 선물하진 않겠죠?
추워서 그런 건 아니니까 뭐 걱정할 건 없어요
생각이 없으니까 부끄럽지는 않아요
정말이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나의 몸이 곧 나의 영혼!
맑은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내 속을 훑고 지나요
그리 유쾌한 온기는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은, 살아 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