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천서봉 시모음 1 본문
서정적, 우로보로스
기차를 타고 가요. 지나친 습도가 비를 불렀겠지만요. 지나치다 지나치다 되뇌어도 길은 자꾸 흘러들었고요. 빗물은 터진 단추처럼 흩어졌지요. 낮게 우물지는 뇌수는 낯설지 않아요. 버릇처럼 나는 오래된 편지를 뒤적거렸고요. 썩은 눈물이 선명한 나이테를 그리고 있었는데요. 바퀴 위에서의 추억은 한 번도 부드럽게 타오르지 못했어요. 기차를 타고 가요. 그물을 뚫고 가요. 욱신거리던 무릎이 신호하던 생애의 파장, 을 창 밖 웅덩이가 한 번 더 보여주네요. 원형들이 환하게 재현하는 북소리. 그리고는 둥둥둥, 수신할 수 없는 날들이 떠서 흘러 다녔지요. 아이들은 미끄러운 동심원을 따서 목에 걸기도 했고요. 암호의 반지를 나누어 갖는 연인도 보이네요. 습기 가득한 바람 속에서 터널은 생각나지 않는 당신 품, 기억하려는 듯 몸 펼친 처형의 시간을 살고요. 지나친 습도가 비를 불렀겠지만요, 다 지나간 뒤에도 길은 남지요. 어서 오세요. 제 목을 당신의 꼬리에 묶어두세요. 굳어 가는 손가락으로 나는 環形의 편지를 뒤적거릴 거예요. 다만 그때 서정은 연기처럼 흩날리는 것. 그런데, 아까부터 우리가 물고 있는 이 붉고 향기로운 밤은 누구의 항문인가요?
행성관측
불행이 따라오지 못할 거라 했다.
지나친 속도로 바람이 지나갔고 야윈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겨울, 겨울,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일찍 생을 마친 너를 생각했다.
대개 너는 아름다웠고 밤은 자리끼처럼 쓸쓸했다.
실비식당에서 저녁을 비우다말고 나는
기다릴 것 없는 따스한 불행들을 다시 한 번 기다렸다.
하모니카 소리 삼키며 저기 하심(河心)을 건너가는 열차.
왜 입맛을 잃고 네 행불의 궤도를 떠도는지.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병상일기
병실의 창문은 벙어리였다.
검은색 코킹제로 봉합된 혀
언제부터 저 입 굳게 다물었는지,
여문 시간의 가장자리로
곰팡이 꽃 더듬거리며 피었다
지면 여기 얼마나 많은 가슴들이
스스로의 말문에 족쇄를 달며 돌아갔겠는가.
외로운 것, 소리 없는 것
몸 밖으로 밀고 나간 영혼들이
올올의 심지처럼 서서
눈 먹먹한 진눈깨비 뿌렸다.
무슨 검사를 하러간다던
옆 침대의 환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쓸쓸한 쟁반 위의 한끼가 그를 기다리고
나는 기다릴 것도 없는
저녁의 과일들을 다시 한 번 씻어놓는다.
막막한 내 숨통의 길을 찾아
천정에 매달린 환풍구가
웅웅웅 겨울을 앓는 동안
내 오랜 병상을 붙들어 오던 불구의 사랑도,
필경엔 거울이나 되어 서성이는
저녁의 창문 같은 것임을 알겠다.
두꺼운 처방전
식후 30분에 복용할 것.
한 번에 두 편 이상 복용하지 말 것.
하루에 다섯 편 이상 복용하지 말 것.
잠 안 오는 밤마다 알약 같은 詩들을 꺼내 읽었네. 머리 위를 공전하던 당신의 골목길. 몇 번을 되돌았을까. 깜박깜박 초저녁 졸음처럼 당신의 행간에는 비가 내리고 몇 소절의 내가 가을을 피하는 밤, 神은 어디쯤 서서 나를 기다렸을까. 나는 반음처럼 살았네. 음계와 음계 사이, 목이 말랐어. 들큼한 한 컵의 물은 구불구불한 내장을 건너 어디로든 거슬러 갈 것이지만, 만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가 轉生이었네, 궤도였네.
탕- 출발선 총소리 울리면
한꺼번에 달려 나가던 아이들,
내 깊은 잠 속을 디디고 왼쪽으로 코너를 돌던
운동장에서 나 여기까지 달려왔네.
곡비 울듯 비 내리고, 늙은 잎새들 즐거이 떠내려가는데, 나는 헛돌았네. 이 한 밤에 깨어 오른팔과 왼팔의 길이를 맞추어 볼뿐이네. 나 어디쯤 당신을 공전하여 내 오른팔 조금 길어졌는지. 궤도여서, 언제나 바깥이어서 서럽던 영혼아 오너라. 알약을 품고 있던 미농지 같은 시간이여, 부재의 중심과 텅 비어있어 아름다운 우리의 당부여, 오독과 남용은 평생 가까이 두고 사귈 병명이니 詩여.
아껴서 아플 삶이여,
오래 오래 울 불치의 악보여.
병상일기
병실의 창문은 벙어리였다.
검은색 코킹제로 봉합된 혀
언제부터 저 입 굳게 다물었는지,
여문 시간의 가장자리로
곰팡이 꽃 더듬거리며 피었다
지면 여기 얼마나 많은 가슴들이
스스로의 말문에 족쇄를 달며 돌아갔겠는가.
외로운 것, 소리 없는 것
몸 밖으로 밀고 나간 영혼들이
올올의 심지처럼 서서
눈 먹먹한 진눈깨비 뿌렸다.
무슨 검사를 하러간다던
옆 침대의 환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쓸쓸한 쟁반 위의 한끼가 그를 기다리고
나는 기다릴 것도 없는
저녁의 과일들을 다시 한 번 씻어놓는다.
막막한 내 숨통의 길을 찾아
천정에 매달린 환풍구가
웅웅웅 겨울을 앓는 동안
내 오랜 병상을 붙들어 오던 불구의 사랑도,
필경엔 거울이나 되어 서성이는
저녁의 창문 같은 것임을 알겠다.
그리운 습격
破片처럼 흩어지네, 사람들
한여름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박히네. 뚝뚝,
머리카락 끝에서 별이 떨어지네.
흰 비둘기 신호탄처럼 날아오르면
지상엔 금새 팬 웅덩이 몇 개 징검다리를 만드네.
철모도 없이, 사내 하나 용감하게 뛰어가네.
대책 없는 市街戰 속엔 총알도 원두막도 그리운 敵도 없네.
마음 골라 디딜 부드러운 폐허뿐이네.
빵 냄새를 길어 올리던 저녁이
불빛 아래 무장해제 되네. 사람들,
거기 일렬의 문장처럼 서서 처형되네.
교과서 깊이 접어 둔 계집애 하나 반듯하게 피었다
지면 사랑아, 모든 첫사랑은
아름다운 패배였을까.
나는 홀로 건너가는 殘兵처럼 남아,
빵집 앞 사거리 침묵이 침묵을 호명하는 낮은 소리 듣네.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네.
소나기의 습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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