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통의 현대적 계승
사람의 성정이 물이라면 그 물이 땅으로 흘러들어가 식물의 씨를 깨우고, 싹이 터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이루는 것이 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의 성정이나 식물의 씨가 시인을 뜻한다면, 땅은 시인에게 주어진
문학적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씨가 자라야 좋은 열매를 볼 수 있듯이 시인된 자는 그가 시의 씨를 뿌려야 할 땅부터 먼저
알아보고 골라보아야 할 것이다. 시의 씨가 뿌려질 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숨을 쉬고 있는 살아 있는 땅이어야 한다. 어떤 땅이 살아 있는
땅인가. 엘리엇의 말대로 하면 문화적 전통이 풍부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역사의식은 과거의 과거성뿐 아니라 현재성에 대한 인식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작가로 하여금 자기 세대를 뼛속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호머 이래의 유럽 문학 전체와 그 일부를 이루는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동시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쓰게끔 한다. 이 역사의식은 시간성의 의식이기도 하고 영원성의 의식이기도 한데,
이것이 작가를 전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작가로 하여금 시간 속에서의 그의 위치, 즉 그 자신의 현재성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하게끔
한다]
물론 엘리엇의 대상은 호머 이래의 유럽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문화적 전통이란 점에서는 우리들 한국인 또한 어느 면에서는
유럽인보다 월등한 천혜의 자원을 갖고 있다. 이른바 동양문화권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발전시켜온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엘리엇이 말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시인정신의 일대 광맥을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문화의 여러 특질은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시인들에게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함께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시인들은 그 원천에서 필요한 것들을 [온 힘을 기울여 얻어내야] 한다. 그러한 원천의 하나로 필자는
한국문화의 한 층을 형성하고 있는 도교를 시인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근 40여년에 걸쳐 필자가 추구해온 시작업은 흔히 동양사상에 그 배경에 둔
것으로 말해진다. 그 중에서도 도교는 가장 매력적인 대상일만큼 무한한 동력을 갖고 있다.
2)도교와
노장사상
시와 종교는 원시시대의 제의에서 보듯이 초월적인 힘과 그 힘을 내 것으로 바꾸려는 주술에 의존하여 서로 주고받는
공생관계를 이루었으나, 시대적 지역적 변화에 따라 각각 자생적인 발전단계를 거침으로써 이제는 서로 습합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이질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발전은 동시에 종교의 신성을 정점으로 삼는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 속에 민중의 습속을 포함한 범문화적 체계를 내장하게
되었고, 이것은 동시에 시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문화적 풍토를 조성한 셈이 되었다. 더구나 여러 종교가 문화적인 층위를 주고받으며
능동적인 발전을 가져온 우리나라야말로 풍부하기 그지없는 광맥이 형성된 셈이다.
한국문화의 광맥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종교 중에서도
필자는 특히 도교를 주목한다. 도교는 이미 사멸한 종교나 다름없고, 이 방면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조명 역시 아직은 미답지나 다름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지만 도교는 고대 한국사에 등장한 이래 그 종교적 특성으로 하여 민중의 기층문화에 잠복해 왔을 뿐아니라 아직도 우리 기층문화 곳곳에 특이한
생명력을 행사하고 있다. 먼저 도교의 개념부터 정리해보자. 도교는 용례에 따라 도가사상과 동의어로 해석되기도 하고, 별개의 용어로
분리되기도 한다. 종교적 체계를 갖춘 채 한국문화에 뿌리를 내린 다른 종교와 달리 도교는 한국문화와의 접속에서부터 종교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분리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수용층의 기호에 따라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그 모두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로
한다.
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종교이다. 중국의 후한 말기, 동한 순제 때 장릉(張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는 민속적 교단 천사도(天師道)를 창설해 전란에 시달리는 민중을 끌어들이며, 당대에 풍미하던 노장사상을 신흥 도교의 기본 교의로 삼았다.
이들은 당초의 종교 세력을 정치세력으로 발전시켜 급기야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전란이 평정된 이후로는 정치적 성격을 배제하고 ‘본래 연약한
인간은 교리를 지켜 무위청정한 생활을 행하면 도에 이르고 장생할 수 있다’는 논리적 체계를 갖추는 한편, 기복적인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민중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교단의 체제를 유교, 불교를 본따 정비하였으며 당(唐), 송(宋), 원(元)에 이르러서는 유(儒)․불(佛)과 나란히 중국
삼교(三敎)의 하나로 발돋음하였다.
도교가 그 모태로 삼은, 도가사상은 중국의 노자와 장자의 철학사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노자(老子 : B.C. 604?~531)는 [도덕경]을 통하여 우주만물이 생성하게 되는 근원인 무(無)의 자연(無爲自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노자를 이어받은 전국시대 장자(莊子 : B.C. 365~290)는 [장자]를 저술하여 현실의 집착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를 따를
때 참되고 자유로운 안심입명(安心立命)과 자신의 생명을 건강하고 오래 유지하는 양생(養生)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문자, 관윤자,
열자, 구관자 등이 가세하였고, 논어에 나오는 장저, 걸익, 접여 등도 그 일파였다 한다. 이들은 노자의 앞에 다시 황제로 상징되는 고대 신앙을
접목시킴으로써 도가사상은 황노사상으로 불리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포박자(抱朴子)』는 이른바 신선사상을 도가사상에 추가함으로써 도가사상과
도교의 가교를 담당하였다. 사마천의 [사기]가 기록하였듯이 한(漢)나라 때는 불로장생의 민간방술과 결합함으로써 황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도교의 절대적인 구심점을 마련하였다.
이로부터 도교는 불로장생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였다.
심리적으로는 인간이 범한 과실이나 나쁜 행동을 감시하는 사과신이 있다고 믿는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과 주술적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호흡조절(調息), 익힌 곡식 먹지 않기(辟穀), 절식(節食), 양생식(養生食), 금욕 및 부적과 푸닥거리로 재난을 피하고 부귀영화를 기원했다.
영웅명장 관우(關羽)와 같은 인격신을 숭배하는 풍습 등 기복적인 요소를 두루 확대해 나감으로써 당대 민중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에까지 연결되는 도교의학의 극치는 금단(金丹)이다. 이 상징화된 금단의 제조를 위한 연금술과 심신수련적인 단학(丹學)을
발전시킴으로써 도교는 내․외단을 통섭하는 이론체계를 성립시켰다. 또한 불교의 우주관을 받아들이고 확대 변형시킴으로써 신선설과 관련한 우주관을
완성시키는 바, 이 우주관은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기층에 깊이 자리잡게 된다. 이종은 교수에 의하면, 도교의 우주는 天上界, 地上界, 仙界,
水府, 冥府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조선조 영웅소설은 물론 일반 심청전에 이르기까지 옥황상제와 용궁 등이 자유자재로 설정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상과 같이 도교는 노장사상 및 기존 종교, 민간신앙을 두루 섭렵한 것이지만, 도교의 기본신앙과 교의(敎義)는 도(道)에 두고
있다. 도를 조화(造化)의 뿌리이며 신명(神明)의 근본이며 천지의 으뜸으로 본다. 그러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도를 신으로
인격화하고 또 노자를 신화시켜 천존으로 숭배하기도 한다. 선행 노장사상을 모태로 하되 시대에 따라 유교․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적
요소들을 지속적으로 수용하여 형성시킨 결과이다.
3) 도교와 한국문학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이고
다른 신앙까지도 큰 마찰 없이 받아들여 포괄하고 생활화함에 따라 중국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의 서민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도교의
우리나라 유입의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624년, 고구려 영류왕 7년에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파견,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케
함으로써 영류왕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AD 640년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로부터 도사 8인과 「도덕경」을 다시
구해왔다고 한다. 또한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서 보듯이, 신라시대에는 신선계파를 형성하는 등 일찍부터 우리민족의 고대사상, 문화와 일상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 행사로 팔관회와 함께 道敎的 醮體를 행하고 이에 따른 醮體文과 靑詞를 남겼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국초에는 昭格殿을 짓고, 道敎的 科儀가 행해졌다. 지금도 서울에는 관운장 숭배의 동묘가 남아 있다. 그러나 도교는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불교와 유교가 치국의 기본이 됨으로써 역사의 표면에서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며, 도교적 상징이나 제의의 일부는
민중의 기층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불교의 사찰 배치에서 볼 수 있는 칠성각이나, 장례에서의 칠성판 등을 예로 들 수 있듯이 유교와 불교에
오히려 역삼투되는 생명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교는 민중의 기층사상으로 자리잡음으로써 그 풍부하고 잡다한 내용이 오히려 우리
문학에 다양한 활력을 제공해 왔다. 특히 한문학과 詩歌面에서는 道家的 문학이 많이 형성되었으니, 이른바 도교의 원리라 할 수 있는 무위자연,
안심입명의 양생, 신선사상 등은 虛靜守己의 處世와 隱逸的 文學을 낳아, 시가와 시조의 바탕을 이루어왔고, 특히 장생불사, 신선사상 등은 조선조
산문 소설의 주 테마로 작용하였다. 도교의 우주관, 신선사상은 영웅소설과 같은 한 군락을 이루거나, 사씨남정기, 별주부전 등과 같은 낭만적
판타지문학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도교 초기 도입기의 을지문덕 시로부터 조선조 허난설헌의 신선시, 송강 정철의 가사, 고산 윤선도의 시조를 비롯한
수많은 고시조 등에서 도교의 영향력을 점검할 수 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도교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쇠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조 이래
도가사상은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하여 통치체제의 견제를 받아, 이들 금서를 연구하는 일은 곧 사문난적의 행위로 엄금되었다. 따라서 지식층이
선호할 수 있는 도가사상의 철리적 내용이 봉쇄된 채 문학양식의 서구식 도입이 진행되자 그에 따른 체제 적응으로 하여, 도교의 한국문학 수용은
한동안 절멸 상태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정치적 상황은 오히려 도교의 아나키즘적 성격, 도교적 은일과 처세수기 등이
저항 시인들 시편에 부분적으로 차용되면서 현대문학과 도교의 접속이 자연스레 진행되게 되었다. 광복 이후 격동기를 거쳐, 60년대로 넘어오면서
도교적 상징과 내용물이 점증하고 있으나,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문학적 탐색이나 조명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 한국 현대시와
도교의 영향력에 대해 발표한 박영호 교수(협성대)의 논문을 보면, 그 역시 이 분야가 연구 미답지임을 전제하면서, 도가사상의 철리적 수용과
도교적 상징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현대시의 용례를 추출하고 있다. 그는 [도가사상이 표방하고 있는 哲理的 개념 가운데서도 특히
‘無爲自然’과 관련된 인식이 현대시에서도 자주 발견된다.]고 말하면서, 필자를 비롯해 이성선, 김용범, 송찬호 등 몇몇 시인들의 시를 텍스트로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위자연’이란 용어의 도가적 의미는 자연의 정신세계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며,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를 현대시에 적용한다면, 그 범위는 정지용의 [장수산] [백록담] 등의 후기시,
신석초의 [비취 단장]과 같은 시편, 신석정, 청록파 등의 자연시편, 나아가 제물론의 [만물제동]이 갖는 무차별의 연속성 원리는 이상과 김기림의
시, 그리고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갖고 있는 풍류도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또한 도교의 한국 현대문학 수용이 더욱
확대된다면, 도교의 잡식성 문화 체질, 그 디오니소스적인 태생적 예술성과 상징이 우리 한국 문학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러한 예는
김동리, 김승옥 등의 소설과 최인훈의 희곡에서 볼 수 있듯이, 보다 더 도교적 상징이 갖는 풍부한 내용을 한국 현대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한국문학 정체성 확립에 한 모범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망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실례로 토착문화와 예술의 이상적 결합이랄 수 있는 남미의
마술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자에 따른다면 시 쓰는 행위 자체가 바로 우주의 도와 합일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우주와 자연의 기에 합일하거나 심취한 상태에서 가장 좋은 예술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너의
형태에 떨고, 너의 총명을 통하고, 사물 속에 있는 너를 잊으며, 크게 영원한 자연의 기운에 합하게 되리라. / 사물을 잊고, 하늘을 잊는 것을
일러 자기를 잊는 것이라 한다. 자기를 잊는 사람을 일러서 하늘에 들어간다고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시인이 시적 영감을 얻어 자신의
영혼과 합일이 되어 시를 창작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졸저 [시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의 서문에서 “시쓰기의 기본원리는
노장시학”이라고 명명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4) 노장사상과 박제천의 시
도교와 현대시의 접속사례의
하나로서 필자의 시와 그에 대한 평자들의 견해를 소개해본다. 필자의 시는 등단 이래 도교와 불교의 영향권으로 지목돼 왔고, 시집 [장자시]
[노자시편] 등에 대해서는 여러 평자들이 노장사상을 거론하거나 노자 도덕경과 시집 [노자시편]의 상관관계를 서술한 바 있다. 따라서 도교와
한국현대시에 관심을 갖는 시인들에게 구구한 논설의 전개보다는 실제의 텍스트가 더 효용적이지 않을까 싶다.
(1)
너라고
말할 때 너는 이미 네가 아니다 너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이미 네가 아니다 이름 없음으로서 너는 비롯된다 이름함으로서 모든
것이 네게서 태어난다 네 없음에서 내 미묘함을 보며 네 있으므로 내 너를 안는다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어둠과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태어난다 //(생략)// - 박제천,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
『老子』첫 구절 ‘道可道非可道
名可名非常名’가 근원에 깔려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박제천의 『노자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40편의 작품은 이처럼 『노자』를 시적으로 변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원전을 단순히 시로 변용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노자』에 구현되어 있는 수사법을 자기만의 시적 기법으로 奪胎시키는가 하면,
노장사상이 지향하는 우주관, 세계관을 현대적 의미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박영호
(2)
박제천의 [노자시편]을
물들이고 있는 시의 향취는 노장의 만물제동(萬物齊同)의 관점으로 성찰한 본체론적 비전이지 추함을 벗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미학의
범주에서 된 층위가 아니다. 박제천의 시어는 장자의 [소요유]의 경지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의 [분계]를 넘어서 [화]의 경지를 체험하고 있다.
꿈과 현실의 분계, 관습과 타성의 연계는 그의 눈에 무용하다. .[중략]그의 시는 강물이 물푸레나무로 바뀌고 산이 모래무지로 둔갑하는 세계다.
노자의 [도]는 물처럼 흘러 통한다. 구태여 이름이 따로 있겠는가. 이름을 넘어선 참의 경지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 투명성의
세계, 달관의 탐취 속에서 박 시인은 눈빛을 가다듬고 있다. [노자시편]은 비교적 착실하게 [노자]의 [도경]과 [덕경]을 바탕으로 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이것을 박제천은 이렇게 풀고 있다:
너라고 말할 때 너는 이미 네가 아니다 너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이미 네가 아니다 이름없음으로서 너는 비롯된다 이름함으로서 모든 것이 네게서 태어난다 네 없음에서 내 미묘함을 보며
네 있으므로 내 너를 안는다
박 시인은 물론 노자의 번역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문의 [도]를 [너]로 푼 것이 특징이다.
[나]는 대명사에 불과함으로 [도의 가히 도라 함은 상도가 아니다]는 이름할 수 없는 도를 일컬음에 버금가는 명명이다. 그러나 [내 너를
안는다]에서 보는 것처럼 [너]가 인칭적인 정감의 대명사로 둔갑할 때 우리는 도사가 아닌 한 시인을 만난다. 박 시인이 또다른 [도사]를 쓰기
위해 이 시집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박제천은 역시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무리 종교나 철학에 가까워진다고 할지라도 종교적인 성취나
[불립문자]의 득도의 경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도 다른 종교와 못지 않는 또다른 종교이기 때문이다.
-민용태
(3)
『노자시편』은 모두 4부 각각 10편씩 모두 40편의 연작시이다. 각각의 시는 <노자>의
말을 텍스트로 삼아 새로운 어법을 시도한 큰 글씨로 씌어진 전반부와, 이에 대한 박제천 자신의 시적 반응을 기록한 작은 글씨로 씌어진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날개는 「너의 이름은 어둠」에서 비롯되는 명명행위가 주조를 이루며 두번째 날개는 「생의 근원」을 출발로 한 삶의 탐구가
그려져 있다. 세번째 날개 「내 더 이상 무엇을」비롯한 시편들에는 깨달음의 완성이 서술되어 있다. 이 네 날개는 분명 시집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체 구성과 아울러 이 연작시의 기본 골격이 되는 것은 너와 나라는
이원적 세계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는 노자가 말한 도나 무를 <너>라고 명명하고 말하는 주체를
<나>라고 지칭하여 상대적이며 이원적인 틀을 통하여 노자의 깨달음은 물론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연작시 『노자시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너라고 말할 때 너는 이미 네가 아니다. 너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이미 네가 아니다 이름없음으로써 너는 비롯된다. 이름함으로써 모든 것이 네게서 태어난다 네 없음에서 네 미묘함을 보며 네 있음으로 내
너를 안는다 너는 있음이라 불리기도 하고 없음이라 불리기도 한다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어둠과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태어난다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위의 시적 진술은 『노자』의 제1장을 응용한 것이다. 『노자』 제1장의 직역은
다음과 같다.
말할 수 있는 道는 常道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常名이 아니다. 이름이 없을 때에는 天地의 始原이요, 이름이
있을 때에는 萬物의 母體다. 그러므로 恒常 無慾함으로써 그 徵符함을 觀察하고, 恒常 有慾함으로써 그 循環함을 觀察한다. 이 兩者는 같이
나오고서도 이름을 달리하니, 한가지로 이것을 玄妙라고 이른다. 玄妙한 가운데 또 玄妙한 것은 모든 妙理의 門이다.
위의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본다면, 박제천이 원문을 어떻게 응용하였는지 자명해진다. 그가 변형시킨 것은 원문의 첫 두 문장이다. 이 두 문장은 <天地의
始源>과 <만물의 母體>를 포착하고자 하였따. <말할 수 있는 道는 常道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常名이
아니다>고 한 노자의 연설을 뒤집어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라고 명명한 박제천의 시적 시도는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
박제천의 시적 개성은 동양의 고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게 만들었으며, 그 나름의 상상력의 모험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그가 동세대의 다른
어떤 시인보다 독보적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략) 『노자시편』은 박제천의 삶 전체를 용해시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 시적 도전의
기록이며, 어쩌면 그것은 지혜로운 깨달음의 차원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고투의 시적 기록으로서 현대시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최동호
(4)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경지는 무차별의 경지다. 이런 경지에서는 꿈과
현실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상상력이 奇想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비법이 이 연속성의 원리다. 그는 서양의 예술(주로 繪畵를 가리킨다)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것」을 배웠고 동양의 예술에서 인간과 사물이 習合되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幻想과
精神>). 전자는 「幻想」이고 후자는 「精神」이라고 그는 각기 명명한다. 현실을 변용하는 원리로서의 상상력이 전자에 상응한다면 연속성의
원리로서의 상상력은 후자에 상응한다. 장자의 형이상학적 공간에서 일체의 만물은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 따라서 죽음과 삶도, 꿈과 인생도
구별이 없다. 무차별은 연속성의 원리에 조응한다.-김준오
이상과 같이 나의 시 속에 담겨 있는 도가적 정신세계를 분석한 예문들을
소개해 보았다. 도교가 한국 문학의 근원부에 오랫동안 추동력을 지닐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도교에서는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의
연년(延年), 영생의 문제만이 다루어나가는 대상이 전부일 뿐이다. 다른 종교에서 강력하게 부각되고 있는 천당이나 극락 또는 지옥과 같은 사후의
문제 등은 도교에 있어서는 애당초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도교는 가장 현실적이요 인간적인 종교일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도교는
그 근저에 놓여 있는 노장사상과 더불어 우리 문학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한 동력이자 한국 현대시는 물론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무한한 광맥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전망하고 있다.
출처, 프리즘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