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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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는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 이병렬

휘수 Hwisu 2006. 7. 3. 01:24

시의 언어는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 고은의「萬人譜」에 나타난 비속어


우리는 흔히 '시(詩)' 하면 서정시를 떠올리고 곧이어 아름다운 언어를 생각한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분명 시는 언어예술인 문학의 한 갈래요,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시를 생각하면 아름다운 언어 그리고 서정시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라는 시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말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김영랑과 같은 서정시인의 시가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디 이뿐이랴.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서정주…… 그들의 시어에는 바로 아름다움이 있다.

1930년대 시문학파의 영향으로 우리의 시는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뇌리에 남아 시는 서정시요, 시어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시는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되기에 시에 쓰이는 언어는 흔히 구체어, 특수어 들이다. 생물보다는 동물이, 동물보다는 가축이, 가축보다는 개가, 개보다는 똥개가 시에 알맞은 언어이다. 바로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해주는 언어들이다. 사랑이라든가 철학 혹은 사상과 같은 관념적인 어휘들은 시에 별로 쓰이지 않는다.

또한 서사문학인 소설과는 달리 관용어 혹은 속담과 같은 표현은 가급적 배제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어들은 이미 그 의미가 굳어져 있기에 시인의 상상력 혹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라고 해서 꼭 그런 표현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서정시를 생각할 때에는 아름다운 언어를 생각해야 할른지 몰라도, 시에는 서정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는 관념어를, 혹은 관용어를, 나아가 속담과 온갖 상스런 말까지 시인이 의도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라고 해서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표현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은의 연작시집인 『만인보』를 함께 읽어보자. 『만인보』는 글자 그대로 만명의 사람에 대한 시로 쓴 기록으로, 시인 고은이 1980년 여름,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
서 구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 그 첫권이 출간된 후 지금까지 15권이 나왔다. 서슬 퍼런 5공 시절, 비상계엄 하에 체포된 시인은, 손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무덤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옛일을 회고하는 것으로 정신적 탈출구를 삼았다고 한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굽이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그가 종신형을 선고 받은 후 사면을 받고 석방된 날부터 6년이 지나서이다.

우선 그의 시집 『만인보』에 나오는 비속어(속담 포함)들을 살펴보자. 분량 관계상 여기에는 ㄱ 부분만 소개한다.(< > 안은 작품명, 권수 표시이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하다 : 집이 매우 가난하다는 말.
* 매양 짝 찢어지게 가난하지만/일하던 갈퀴손 빈 손이지만/이놈 잘 있었느냐고 머리 쓰다듬을 때는/…든든하였다 신났다 <사정리 할아버지, ①>
* 밭뙈기 하나 없지만/가랑이 짝 찢어지게 가난뱅이지만/마음 하나는 무던히도 텅 비어 커다랗지요 <복만이 아저씨, ①>
* 한평생을 가랑이 찢어지게 가난노릇만 한 사람 <황희, ②>

가운뎃다리 : 남자의 성기.
* 학생들 가운뎃다리 어느새 뻣뻣해진 것 알고/가서 뒷간에 다녀오너라/다녀오면/세상이 문득 허망하니라 <여서방, ⑧>

간나새끼 : 못마땅한 사람을 욕으로 하는 말.
* 야 이 좆대가리 간사새끼 인사하고 가라우야 <넓적이 어미, ⑨>

갈보 : 몸을 팔며 천하게 노는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 학자는 무슨 놈의 학자/백두개 주막 갈보님이나 만지작거리겠지/에끼 이 사람아 <수진이 아버지의 풍류, ③>

갈보굴 : 사창굴. 사창들이 많이 모여서 밀매음하는 곳.
* 군산 히빠리마찌/놀다 가/놀다 가/잡아당기는 갈보굴 <춘자, ⑥>

개구멍 사내 : 개구멍서방. 남편 있는 계집과 남몰래 정을 통하는 남자.
* 그런 인간인지라/마누라인들 정나미 나가버리고 나서/개구멍 이웃 사내한테/그만 정을 주었는데 <지서방, ⑧>

개보지다 : 몹시 못마땅함을 욕으로 이르는 말.
* 미결수 대기소 벽에도/감방 벽에도 썼다/유신 개좆 개보지라고/유신철폐라고 <공중변소 낚서꾼, ⑩>

개 뿔붙다 : 개가 교미하다.
* 개 뿔붙은 것 구경하듯이/뱀 엉긴 것 구경하듯이/얼라 또 복동이 싸움이여 <미제 두 복동이, ②>

개새끼 : 하는 짓이 못마땅한 남자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
* 뒤처진 조화순 소리 지르기를/이 개새끼들아/그래 민주화도 못해/통일도 못해/이 개새끼들아 <조화순, ⑫>

개소리 :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는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
* 똑딱선 한 척은 갖다 바쳐야겠다/하고/사나운 수염밭 문질러대며 노가리깨나 까는데/그런 개소리 못 들은 척하고/긴 댕기머리/칠흑 같은 검은 머리 등에 드리워/의젓하구나 <다홍 치마, ⑧>

개수작 :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욕으로 이르는 말.
* 한이라고?/그 무슨 개수작인고?/퉤 천년 묵은 한! 아나 한! 한 좋아하네 <을밀대, ①>

개좆이다 : 몹시 못마땅함으로 욕으로 이르는 말. 개좆같다.
* 미결수 대기소 벽에도/감방 벽에도 썼다/유신 개좆 개보지라고/유신철폐라고 <공중변소 낙서꾼, ⑩>

개좆부리 : '감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
* 이놈아 개좆부리나 달고 다니는 놈아/진작 눈 딱 감아버려라 <묵은장 생선집, ④>

고자 처가 다니듯 :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도 아무런 실속이 없음을 이르는 말.
* 임 보러 가시나/고자 처가집 가시나/하고 비스듬히 말 걸어도/태연자약한 대꾸 한번/멋들어지지 <선제리 멋쟁이, ②>

군발이 : '군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 검은 안경이거나/걸핏하면 빼드는 권총이거나/이 새끼 저 새끼/군발이판에서//거의 유일하게 인텔리겐챠의 얼굴이었다.

굵은 똥 싼다 : 잘 먹고 잘 산다. 돈푼깨나 있어 잘 살고 있다.
* 그렇게 굵은 똥 싸며 살아가다가/또 한번 아기 들어/이번에야말로 아들 점지하소서 점지하소서 <곰보댁, ⑤>

귀때기 : '귀'를 속되게 이르는 말.
* 늙은 중 귀때기 잡고/이놈!/늙은 중이야 <은적사 어린 중, ②>

귀신년놈 :
* 어느 하늘놈 막아주나/어느 귀신년놈 막아주나 <지붕, ②>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 분명하지 아니하게 우물우물 말하는 소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그 연기 속에서도/애췌! 애췌! 하며/구시렁거리는 소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어찌 온다는 사람 안 온다지? <애꾸 아주머니, ①>

귀신 씹이다 : 낮거리를 일삼는 오입쟁이들은 정상적으로 밤에 하는 정사를 도리어 무슨 귀신씹이냐고 빈정댄 데서 나온 말.
* 넨장칠 것! /캄캄한 밤중 ×이 무슨 귀신×이여 <낮거리, ⑦>

기둥서방 : 몸 파는 여자들의 영업을 돌보아 주면서 얻어먹고 지내는 사내.
* 거친 손님 들고 나는 데라/기둥으로 둔 서방인데/그게 역전 깡패 찌그럭지라 <정분이, ⑨>

꼬라지 : 사람의 모양이나 처지, 또는 형편을 얕잡아 이르는 말.
* 싸가지 없는 이승만 꼬라지 /진작부터 알았다 <김창숙, ②>


다들 느끼는 것이겠지만 시에 쓰이는 언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어휘들은 엄연히 고은의 시집 『만인보』에서 발췌한 것들이고, 그 어휘들은 각각의 시 속에서 주제의식 혹은 인물의 성격을 참으로 진솔하게 나타내주는 것들이다. 그런 어휘가 아니고서는 각각의 시에서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참모습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고은이 감방에서 구상한 것이니, 『만인보』의 전체적인 주제를 권력에의 투쟁 혹은 투항이나 현실순응 혹은 현실도피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만인보』는 제목 그대로 고은이란 시인이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일 뿐이다. 농투성이나 노동자와 같은 밑바닥 사람들로부터, 대통령이나 장관 혹은 교수에 이르는 지식인들까지 시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의 모습이 참으로 진솔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이 배어있는 언어가 쓰여졌다.

시는 단순히 고상한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구체적이고 땀냄새가 배어있는 진솔한 언어로 쓰여질 때에 참으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을 고은의 『만인보』가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인보』에 나타난 비속어·속담 등을 통해 시에 쓰이는 언어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프리즘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