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작품>
단순판단
1* 새벽까지 켜진 불빛은 2* 자기 욕망의 밝힘만은
아니다 3* 길을 밝히거나 4* 장애 표시로 켜 있거나 5* 맡은 일 하나씩은 비추고 있다
1* 항공기 장애등이
깜빡이는 옥상 2* 새벽은 언제나 안개로 열리는데
1* 안개는 분명 산 밑에서 와서 2* 작은 골목 큰 골목을 쉽게
넘치지 3* 지붕을 남기고 불빛을 남기고 4* 나중엔 그도저도 다아 삼키고 5*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십사층 옥상엔 6*
뛰어내려도 포근할 듯 발 밑은 안개
1* 안개에 휩싸인 가등 행렬 2* 세사에 파묻힌 시인의 행렬
<
평설 >
시에도 논리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상상력이라도 독자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씌어진 내용이 읽는이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적 논리의 필요성이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거나 혹은 아름답고
멋진 문장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횡설 수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를 쓸 때의 시인의 자세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시를 쓰게 만든 어떤 감정이나 감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으면, 시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갖추어지게 된다. 이 시는 시적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연과 연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없다.
불빛이 비치다가 안개가 끼어들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선명하지 않다. 제목조차 관념적이어서 더욱 혼돈스럽다.
이럴 경우에는 한 줄기의 이야기만 남긴 채 다른 구절들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멋진 표현이라서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시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연 4행의 ‘장애 표시로 켜 있거나’는 불빛이라기에 애매 모호하다.
신호등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런 때에는 ‘장애 표시로 켜진 신호등이거나’로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좀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5행의 ‘맡은 일 하나씩은 비추고 있다’는 어딘가 어색하게 읽혀진다.
그 이유는 마치 번역된 문장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인들 중에서도 마치 번역시를 읽는 듯한 시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 문장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우리 말의 어법을 제대로 익혀서 올바른 문장을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목 「단순 판단」은 그대로 두고 이 시를 고쳐 보도록 하자. 관념적인 제목일 경우 시의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 되어
제목이 의도하려는 바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시의 내용이 관념적일 때는 제목을 구체적으로 붙여 시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도록 하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요령이다.
특히 마지막 연은 비약이 지나친 감이 있다. ‘안개에 휩싸인 가등 행렬’과 ‘세사에 파묻힌 시인의 행렬’이 대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시를 곰곰이 훑어보아도 이해할 수 없다. 가등 행렬과 시인의 행렬을 하나로 꿰어줄 수 있는 매개어가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있든 숨겨져 있든, 읽는 이가 납득할 수 있어야 시적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제 몫의 반짝임을 다 해낸 불빛들이 새벽 안개 속에 사라져가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지은이는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풀어 쓴다면 명료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정
작품은 어색한 어휘와 흐름을 막은 걸림돌을 삭제하고, 연결 어미를 제거한 것이다. 1연의 3,4행과 3연의 6행 그리고 4연을 모두
삭제했다. 새로이 마무리를 만들어야 하지만 버리는 것도 좋은 수정 방법이다. 한번 쓴 작품을 애지중지할 필요는 없다. 그 안에
좋은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면 뒷날 다른 작품을 쓸 때 다시 써지게 마련이다.
원작자는 특히 시와 산문을 다르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 왜 시와 산문이 다른가. 쓰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시나
산문이나 같다. 다만 시에서는 행의 바뀜, 연의 바뀜, 주격의 생략 등이 허용될 뿐이다. 시라 해서 뜻이 통하지 않는 구문까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뜻이 통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아닌가.
많은 초심자가 시에서 마음대로 상황을 바꾸거나 낱말을 생략한다. 본인은 그래도 다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의 기본은 우선 전달이 되어야 하고, 전달이 되어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며, 설득력을
가져야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감 속에 감동의 폭이 정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수정
>
단순판단
새벽까지 켜진 불빛은 누군가를 밝혀준다. 제몫의 빛을 비춘다
항공기 장애등이
깜빡이는 옥상 새벽 안개가 풀린다
안개는 산 밑에서 와서 작은 골목 큰 골목을 쉽게 넘쳐온다 지붕만 남기고 불빛만
남기고 나중엔 그도저도 다아 삼키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24층 옥상에 서서 안개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작은 불빛을 생각한다.
출처, 프리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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