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종태 시모음 본문
1971년 경북 김천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현대시 전공 계간 시 전문지 「시안」에서 편집기획위원을 역임
「정지용 시의 동양적 자연관 연구」라는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한국학술진흥재단 2000년 신진연구인력 공모">에 당선
현재 호서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동 대학 인문학부 겸임교수
고려대학교와 동서울대학에 출강
지은 책으로 <시와 소설을 읽는 문학교실>(하늘연못, 2000)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등
술빵
버스 정류장 옆에 빨간 다라이 가득
엇구수한 옥수수 내에 정신 번쩍 들었습니다
누렇게 부풀어오른 술빵을 보았던 겁니다
1,000 원에 하나짜리 덥석 베어 무니
누가 뒤통수를 만지는 듯 대낮이 훤합니다
나머지 쑤셔 넣은 가방 사이로 퍼져나는 막걸리 냄새
술로 빵을 만든 건지 빵으로 술을 빚은 건지
한잔 술도 못 이기는 가련한 서른 세 살입니다
그 옛날 똥돼지 몰고 장에 나온 어머니 손잡고
또 한 손엔 술빵 쥐고 거닐던 김천 우시장
황소 등때기엔 여린 눈발이 오늘처럼
푸시시 햇살 속으로 흩날렸습니다
속에 박힌 검은콩이 건포도로 바뀌었어도
언제나 그렇고 그런 맛과 향
낮술에 취한 채 얼큰한 술국은
울렁거리는 마음 여기저기로
술술 새 나가고 있었습니다
세탁기 돌리는 남자
남자는 새벽 한 시마다 세탁기를 돌린다
아래층 아줌마의 항의는 일거에
무시하고
빨랫감 없는 날이면 새로 산 양복이나
얼마 안 입은 운동복까지 둘둘
말아
'한스푼'을 열 스푼이나 퍼 넣곤 한다
그의 오랜 세탁기는
덜덜거리면
좁은 베란다 공간을 이리저리 노닐다가
'립스틱 짙게 바르고'나 '애모'에
덜컥
멈추어 퐁퐁퐁 물을 뿜는다
바닥에 물거품 흥건할 때 그
남자
도망간 여자 생각에 눈시울 붉히고
세탁기 물배를 채울 시간이면
랄랄라 손뼉 치며 '라거'를 딴다
복사지처럼 하얀 속옷을 꺼낼
때
신생의 기쁨이라도 맛볼 수 있는 건지
이렇게 세탁기와 친한
까닭은
하나뿐인 식솔인 바퀴벌레도 몰라
세탁기를 돌릴 수 있는 새벽 한
시의
회전과 충돌과 엉킴이 너무 좋아
잔뜩 불어터진 남자의
얼굴은
날마다 검은 하수구에 엉길 수도 있지만
앵두가 익을 무렵
마을회관 앞 앵두나무 다 익으면
떠났던 사람들 돌아올 것입니다
잎보다 먼저 오판화(五瓣花)가 피듯이
앵두는 한 순간에 다 익는 법 없습니다
설익은 것들이 푸른 잎사귀 위로 쫑긋할
때
농익어 주름진 것들은 황토 물들이며 사라집니다
앵두가 익을 무렵 앵두는 지고
지는 열매를 주우러 모여든 할머니들은
기웃한 삽짝 같은 기억을 앵두칠합니다
붉게 물든 혓바닥이 만든 광채에 이끌려
골목을 뛰어다니는 핵과(核果)같은 아이들도
앵두를 얻어먹으러 이 골목에 멈춥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누가 앵두의 시절을 믿을까요
앵두가 익을 무렵, 없는 나무에 손 뻗어
앵두를 흘리는 어린 소녀들을 보았습니다
초저녁 그믐 달빛 젖어 앵두장수 떠나가고
시간을 잃어버린 할머니들은 오랜만에
주인
없는 앵두 앞에서 홍조를 띱니다
연서(戀書)같은 꽃 기별 듣거들랑 누이처럼 오구려
앵두는 익어도 오지 않는 사람들 있어
벌레
먹은 꽃받침처럼 황혼에 역력합니다
동지일 부근
식권이 든 누런 봉투를 받은 십이월의 아침
내가 월식月食하던 아래층 아줌마는
대학 병원애 입원하였다
계란을 두 개씩 프라이하던 아줌마가
초경을 추억하며 가슴 뭉클해질 때
앞뜰 감잎의 알수없는 수화는
미련없이 떨어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숙생들은 통 모이지 않았고
빨랫감만 쌓여 가던 날들이었다
퇴원한 아줌마는 늦은 햇살에
손이 시리다면서 커튼을 쳤다
된장 빛 누르퉁퉁한 손으로 툭툭 까는
마늘 냄새를 맡다가
지는 해는 조금씩 길어져 가리라
오래 닦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물혹 난 자궁 같은 낮달이 떴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둔 식권 두 장
불알처럼 춥다
마른 장마
얼마나 많은 속옷을 갈아입어야 너 사는 사막에 닿을 수 있을까
세탁기처럼 제자리 돌아야 한다는 것은 홀로 젖는
일일 뿐이다
베란다로 넘어오는 어둠은 오랜 마음의 삼투를 이기지 못하고
몸 안의 시간들을 버릴수록 뿌옇게 되살아오는 기억의 물거품
한번 흘러간 것들은 천둥으로도 번갯불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곧 열대야가 오겠지만 나는 작은 소리에도 고막이 터진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