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영식 시모음 본문
1960년 경북 구룡포 출생
2007 동양일보, 강원일보 신춘 시부분 당선
2007년 현대시학 봄호 신인상 수상
오월
아이가
굴렁쇠를 굴린다
빈 골목이 출렁거린다
투명한 바퀴가 오후의 적막을 감는다
파닥거리며 햇살과 바람이
허공이 한 아름씩 감겨든다
감긴 것들이 말려들어가
둥근 시간이 된다 제 몸 속
길을 떠밀며 달려가는 아이
플라타너스 강둑 위
굴렁쇠가 아이를 굴린다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는
새소리처럼 지저귄다
자궁처럼 환한,
굴렁쇠 안 깊숙이 둥근 산이 눕는다
둥근 물소리도 따라 눕는다
들녘 끝
은빛실타래가 천천히
감긴 길을 풀어낸다
고요하던 풍경이 수런거린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섶
햇살과 바람이 풀린다
노을 몇 점 걸어 나와
강가에 걸터앉는다
텅 빈,
허공을 밀고 가는 아이
우주 한켠, 챠르르
지구가 굴러간다 오월이
푸르게 자전한다
2007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소라여인숙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화등선
빗방울이 베란다 유리창을 붙들고 있다
간밤 어둠이 불륜처럼 슬어놓은 알들
둥근 발톱으로 수직의 절벽 움켜쥐고 있다
염낭거미가 잎 말아 만든 두루주머니 같다
실을 토해 제 몸에 감옥을 씌운 누에고치처럼
오글오글 모여앉아 변태를 기다리는 것들
점점이 찍어놓은 마침표 같은 그것들이 가슴에 조용히
날개와 몸통, 여윈 발을 묻고 있는 걸 본다
실핏줄 사이로 가늘게 들숨 날숨도 쉬면서
젖은 눈알을 염주처럼 굴리고 있다
밤새 추위에 떨던 입술 오물거리며 조금씩
빛알갱일 환약처럼 삼키고 있는,
눈가에 검은 눈썹달을 매단, 이글루 같은 입자들은
바람이 불면 꿈틀!
천 길 낭떠러지 아랠 굽어보기도 한다
수천의 꼼지락거림이 그린 한 장의 회화繪畵
이윽고 구름 사이로 태양마차가 내려오자
겨드랑이 밑 날개를 꺼내 일제히
어린 고양이 털 같은 공길 가르며
물나비떼가 공중의 산맥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내 죽지에서 자욱이 날갯짓소리가 들려왔다
물꽃
냄비 속 물이 끓는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흰 챠도르 두른 물의 분자들이 비등점까지 솟구쳐 오른다
물 갈피에 갇혀 있던 막막한 기다림들이 일제히
둥근 수면을 떠밀며 돌기하고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하는 꽃몽오리들
푸르르푸르 새의 부리처럼 지저귄다
어둠 속을 고요하게 흐르기만 하던,
샘에 앉아 기껏 허공의 얼굴이나 비추던 그녀는
얼마나 목이 타는 말을
제 뼈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간절한 것들은 모두 꽃이 된다고 물은 지금
최초의 설렘인 듯 최후의 결심인 듯
전심전력으로 피어나고 있다 몸속에
뿌리, 줄기를 감추고 있는 저 구름가계의 족속들은
더러는 수증기가 되어 천정까지 발돋움 한다
무수한 골짜기와 봉우리가 일어섰단 스러지고
흰 머리칼 쓸어 넘기며
젖은 입술 흔들어대며
가스레인지 위로 화르르 끓는 절정을 토해내는 그녀의,
뜨거운 혓바닥이 밀어 올리는 수천의 아우성들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는 무뇌아처럼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생을 가진
슬픔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다
돌풍
시장 바닥에 노랗게 서서 누군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릴 지르는 여자,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격렬한 파동은 짧고 빠른 혀를 가졌다
천둥처럼 터지는 격음의 혓바닥들이
지느러밀 파닥거리며 좁은 골목을 헤엄친다
제 설움에 컥컥 목이 메다가
물간 생선 좌판 위로 거칠게 뿜어대는 시퍼런 적의
무엇이 또 혼자 사는 늙은 여자의 슬픔을 요동치게 했는가
향유고래 같은 여자의 숨구멍에서 솟구쳐 나온 울분들이
포목점이며 참기름집 처마를 쥐고 흔드는 동안
사람들은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무심히 바라볼 뿐,
몸 밖으로 뛰쳐나온 수만 개 말들이 수만 개
눈 부릅뜨며 집어삼킬 대상을 탐색한다 비칠비칠
애먼 시비의 가시권 밖으로 물러서는 사람들
을 집요하게 좇아가 어깨를 붙잡는 혀
삿대질하는 손끝에서 공기들은 하얗게 질린다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시장골목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억울한 허공의 멱살만 움켜잡던 말이
동굴 같은 입속으로 캄캄하게 삼켜질 때까지
질펀한 자전自轉을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시장은
잠시 오래 침묵한다 길바닥에 마구 흩어진 회오리를
주섬주섬 거둬들인 여자가 다시 좌판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미처 수거하지 않은 몇 개의 혀가
지나가는 이들의 발뒤꿈치를 문다, 덥석
떠들썩한 식사
오래 기다리던 빗소리가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처럼 창을 두드리는
오후 두시의 강변뷔페 안
창가 식탁에 앉아있는 젊은 부부
힐끔거리며 건너오는 시선들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수화를 나누고 있다 남자는
아내의 빈 그릇 위에 부지런히 음식을 옮겨놓고
봉긋 배가 부른 여자는 웃음을 깨물며
나비머리 예쁜 고개를 팔랑팔랑 젓는다
남루한 날갤 파닥여 부지런히 필담을 건네는
두 사람의 소곤소곤 떠들썩한 말이 식탁위로
한낮의 고요 사이로 열대어처럼 헤엄쳐 다닌다
빈 들녘이 창가로 바짝 무릎을 당겨 앉는 동안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빙그르르 한줌 허공을 돌리기도 하는,
공중의 갈피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음 모음이
쟁반 같은 가슴에 고봉으로 담긴다 어느새
키가 커진 노랑하늘말나리 실내를 기웃거리고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잠시 밀쳐두었던 어떤 사소함을 생각하는 듯
창 안쪽으로 모여든, 빗소리보다 많아진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 떼 날갯짓
물비늘 같은 한나절이 지느러밀 파닥이고
무수한 파문사이로 여름 산이 건너오고
북평* 물장수
북평 장날
단봉들길 물가장길을 마중물처럼 걸어가면
내가 모르는 아득한 순간에 한때
이 골목에 살 붙이고 살았다는 느낌이
북평약국, 북평참기름집이 빼꼼이
미닫이문 열고 오래 적적했던 안부를 묻는다
알 수 없는 시간들이 몸 안으로 흘러오고
아버지가 살았다는 북청을 나는 왜 이명처럼
북평으로 환청했던 것일까
정선더덕이며 농기구, 엿 좌판으로 떠들썩한 시장 한켠
담벼락에 기대 선 낡은 물지게, 나는
등태에 긴 막대길 가로댄 물통 가득
출렁거리는 골목을 담고 깔깔대는 아낙들 농담도 채우고
물이요, 물! 성냥갑 가게마다 한 동이씩
누비솜옷 같은 희망을 배달했을라나
북평이불집 북평옹기점 돌아 물지겐
적막한 아버지의 시절을 지나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휘적휘적 달려간다
천식처럼 쿨럭거리며 증기기관차는
만주벌판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임시정부처럼 망명해가고
독립군 같은 짜장면 냄새가 등 뒤를 밟아와
어이! 물장수, 북평물장수 더벅머릴 당기는,
그리움에 돌아보는 북쪽하늘
쇠기러기 떼 출렁출렁 물밀 듯 날아간다
* 동해시 북평동
2007 현대시학 봄호 신인상 수상작, 이상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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