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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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현수(한국일보 신춘문예당선. 젊은 시인상수상)

휘수 Hwisu 2007. 4. 12. 00:47

박 현 수 시인

<약 력>


◇ 1966년 경북 봉화 출생

◇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 . 출간

   * 2007. 한국시인협회에서  『위험한 독서』(천년의시작)로 제3회 젊은시인상 수상

◇ 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숙박계의 현대시사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 데도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궁색한 실록의 시절
뒤통수 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검은 표지의 명부에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시선을 둘 데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내 어깨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시들만은 제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되리라
이 느닷없는 호출에도
그즈음 현대시사는 평온하기만 했고
검은 책 앞에서 고민하던 사가도 잊혀갔지만
화양리에서 엮는 변두리 시사에는
계몽과 실험이
몸을 섞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늘 여자 반, 남자 반으로 이루어진
금기도 없고 계통도
묻지 않는 뜨거운 불륜도 거기 있었다
거기,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건성으로 읽던 현대시사가 있었다 
 

실종
- 시국시편(詩國詩篇)


연필을 찾는 동안 사라진 수많은 구절들은 어
디로 갈까 사라지면서 더 빛나는 구절들 어느 이
름 없는 바닷가에 닿아 저희들끼리 마을을 이루
고 있을까 아무도 찾지 않으면 바짝 야위어 마침
내 별이 될까 완성된 시의 행간마다 얼핏 빛나는
그림자 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면 어느 시인의
뜨락에 별똥별로 다시 떨어질까 어느 시도 온전
히 빛나지 않은 건 그들의 빈자리 때문이었을까
메모지를 펴는 동안 사라진 수많은 구절들은 지
금 어느 이정표를 읽고 있을까
 
 
서시
- 시국시편(詩國詩篇)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시국詩國이 있다
말씀으로 성문을 열고 노래로 닫는다 고을마다 커
다란 종이 있어 보시종報詩鐘이라 부른다 노을빛이
영험하거나 쌍무지개가 찬란히 서는 날이면 울려
국인이 이를 놓치지 않도록 한다 종이 울리면 모두
손을 놓고 망루나 언덕에 올라 하루를 가벼이 한다
시관詩官*을 두어 종을 울리되 소홀하면 엄히 다스
린다

* 「태시기(太詩記)」에 의하면 시관(詩官)은 아홉
가지 상서로움이 나타날 때 종을 울린다고 한다. 그
것은 애기똥꽃이 필 때, 쌍무지개가 뜰 때, 봄비가
내릴 때, 노을이 고울 때, 서설이 내릴 때, 미리내가
맑을 때, 새털구름이 신비할 때, 하늘빛이 찬란할 때,
좋은 시가 나올 때이다.

 


 물수제비

 

 

말없음표처럼
이 세상
건너다 점점이 사라지는
말일지라도
침묵 속에 가라앉을 꿈일지라도
자신을 삼켜버릴
푸르고 깊은 수심을 딛고
떠오를 수밖에 없다
떠올라
저 끝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수면과 간신히 맞닿으며
한 뼘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수평선을 닮아야 한다, 귀는
 
 
장마

 

 

날선 것들은
날카로움과 빛을 내려놓고
모든 악기는
팽팽한 현을 놓아 버린다
건조한 책들은
몽상을 머금어 부풀어 오르고
깃을 버린 새들은
지느러미를 달고
촘촘해진 에테르를 헤엄쳐간다

나무, 물방울
둥지, 물방울, 해, 물방울
걷다, 물방울
생각하다, 물방울
모든 말의
종지형은 물방울
지친 세계는
가만히 무릎을 안고
등을 구부려
눅눅한 꿈을 꾼다
쉼표, 물방울


 
시작법을 위한 기도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 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석탄박물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채기 난다
왜 하나같이
유년은
쐐기문자로 적혀 있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바늘 끝뿐인 통사들로 새겨진
점토판의 홈마다
탄가루가 묻어나는 어휘들
발음되지 않는 상처들
가시철망으로 제본을 하고
탱자나무 가시로 장정을 했을지라도
내생에까지 가져가야 할
책이 있는 법이지만
페이지마다 가득한 미늘들
너무 깊숙이 삼켜
아프지 않고는 꺼낼 수 없다
 
 
출정

 

 

길 떠나기 전
태풍의 마음이야

흔들리는 혼돈을 짚고
푸른 양수를
뚝뚝 떨어트리며
꿈틀꿈틀 일어나는 내 무릎을 봐
희고 푸른 수로의
정맥과 동맥, 구름의 근육
바람의 뼈들이
은빛 등나무처럼 엮어올리는 내 어깨를 봐
소용돌이의 등뼈를 곧추세우고
어둠의 끝을
응시하는 빛나는 이마에
찰랑찰랑
별이 부딪는 투명한 소리를 들어봐
흔적을 지닌
모든 것은 가라앉아 버리는,
단단한 것은
모두 숨결이 되어버리는 이 늪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어
첫 발자욱이
다음 발자욱을 만들 듯이
늪에서 뽑아올린
힘으로 늪을 딛고 나아가는 거야

이 보폭의
한가운데 있는 건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강철의 의지,
금강석 같은 강령이 아니야
이 세계의 바탕에 있다는
쪼개지지 않는
단단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란
결석처럼 일종의 병일 뿐
소용돌이치는
내 마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건
텅 빈 에너지
묵상과 같이 고요하지만
무정형의 열정으로 뜨거운
텅 빈 중심
틈으로 가득 차 있는 무정형의 계기들
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간격들
모든 것의 빈터이자
생성의 풀무인 이 회오리의 눈

내 발걸음이
갈래갈래
새로운 길을 흘러보내듯
내 마음의 미동이
너울로 일어나 해일로 넘치고
폭풍우로 건너뛰는 거야
회오리치는
사유들이
지친 등고선을 쟁기질 해버리고
엉킨 위도와 경도를
써레질해버리는 거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 순간
소멸해버리는 거야
내 그림자를 온대성 저기압이라 부른대도
그건 루머일 뿐
절정만이 삶이니까
 
 
 
고인돌

 

 

1

거대한 바위로
상상력을 포석하던 시대를 경배하라


2

신이 사물들 사이로 사라지고
인간의 마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구름도
어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망막에 비친 사물들은
신으로 가는 통로를 알지 못 한다
모든 길은 폐쇄되었다
폭우에 잘려나간 길처럼
다시 끌어올릴 수 없다
마을은 고립되었다
새들도 제 이웃을 잊어 버렸다


3

언덕 위엔
무거운 구름이 들어 올려지기 시작하였다
반쯤 땅에 박히고 땅 속에
묻혀버리고
언덕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한때 하늘을 떠다니다가
지상에 가라앉은
거대한 빵들이 공중부양을 시작하였다
등뼈 곧은 꿈들이
지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떼 위에 떠다니는 장수풍뎅이처럼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지상의 구름은 언덕으로 옮겨지고
그 아래 수많은 욕망의
척추들이 지네발처럼 분주하였다


4

동트는 언덕에
기단부로만 세운 원형의 탑
정결한 식탁에
올린 한 덩이의 솜사탕
거대한 주제일수록
수사학은 가난해지고
오래 다듬을수록 구도는 단순해진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촉은
기도처럼 돌아왔으나
하늘로 오르는 향연의 길은 열렸다
묵직한 단어
몇 개로 건축한
최초의 시가 봉헌되었다

숭고의 문이 세워졌다
초월로 가는 경전이 완성되었다


5

애드밸룬처럼
맛있게 허공에 들린 빵
엄청난 무게의 구름
이것을 공중에 올려놓은 것은
거인이 아니다
심연 속에 유동하는, 피할 수 없는
가는 등뼈들의 욕망이다
키 작은 검은모루동굴 사람들로부터
내려온 은밀한 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욕망


6

저 거대한 바위 아래
미세한 돌촉,
정교한 칼날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거대함 아래 눌려 있다
정교함은 바위의 자세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구성할 수는 없다
세대를 아득하게
이어나간들
영원히 그 자세에 도달할 수 없다


7

허구는 거대할수록
실재한다
무너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시총(詩塚)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성곡동에 시총(詩塚)과
비(碑)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쟁의 이슬로 사라
진 정의번의 유해를 찾지 못하여 그 사람이 생전
에 지은 시를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다.


1. 촉도난

지상의 지도로는
어차피
다가가기 어려운 길이었다
지도에 있던 임고 나들목은 사라지고
서포항까지 갔다가
북영천으로 돌아와도
잘 뚫린 길은
동서남북으로 이름을 덧댄 대처행일 뿐
면사무소와 파출소만 황급히
산록으로 빠져나온
수몰된 마을을 내려다보는
수몰되지 않는
시총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른다
세월은 물처럼 빈틈없이 스며들어
물 아래 옛 길을
물고기에게 내주었지만
시총을 세운
마음들은
노을 속에서 오래도록 젖지 않는다


2. 묘비명

시로써 무덤을 삼음은 예(禮)에는 없는 예일러니
선유(先儒)께서 초혼(招魂)을 하여 장례를 지냄을
말하되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
로 돌아가느니 진실로 체백(體魄)이 없으면 사당
에서 제사 지낼 뿐 혼기(魂氣)는 장례 지낼 수 없
는 법이라 하였거늘 그러한 즉 화살로 복(復)을 하
고 옷으로 초혼한 것으로는 모두 무덤으로 삼을 수
는 없는 것이어라 오로지 시라는 것은 그 사람과 닮
은 것이기에 가히 체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니
시로써 무덤을 삼음은 그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않을
진저 세상에는 반드시 뼈로 장례를 한 것은 다행이
라 여기고 시로 장례한 것은 불행이라 여기지만 거
친 벌판에 뼈를 묻은 것이 한둘이 아닐지언정 마침
내 후멸(朽滅)로 돌아가는데 그 사람과 시는 마침내
오래토록 썩지 않는 것이니 이 무덤은 얼마나 위대
한 것이랴


3. 불여귀

이 세상 어딘가에
시가 묻혀
있을 무덤을 생각하면
생은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문장이 삼백 예순의 뼈를
이루고 글자가
수억의 피톨로 떠돌고
문맥이 좌청룡
우백호를 타고 흐르며
한 생을
거뜬히 대신하고 누워 계신
시를 생각하면
시는 영혼이라는,
시는 몸 너머에 존재한다는
오랜 믿음들
문득, 후멸로 돌아간다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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