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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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작 모음

휘수 Hwisu 2007. 4. 17. 23:55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

 

인력시장에서 / 서상규

때 절은 호주머니 속 동전 몇 닢이
방울경쇠로 짤랑거린다
새벽 별이 핏발 선
눈망울을 굴리며 길을 밟는다
동틀 무렵 어둠의 갈피가 푸르러지며
코뚜레를 꿴 달빛이 고삐를 바짝 조인다

날빛에 목이 졸리기 직전의
창백한 수은등 아래
그림자에 묶인 소 떼가
흰 콧김을 내뿜으며 서성거리고 있다
온기 몇 점으로 온정을 나누는 드럼통 속
불길에서 파랗게 돋은 정맥을 끄집어낸다
산맥의 혈이 뻗어 내린
힘줄로 밭을 갈던 한 시절
꿈길을 되짚어 하루 노역을 점친다

거간꾼들이 나타날 때마다
저마다 앙상한 골격을 부풀리고
순한 이빨을 드러낸다
누구도 찌른 적이 없는 야성의 뿔을 들이밀며
복종의 표시로 한껏 머리를 숙이지만
풀빛 지폐 몇 장으로 벌이는
흥정은 튼실한 소에게로 향할 뿐이다

하루치의 건초에 행운을 되새기는
눈길이 발굽에 차인다
가스러진 터럭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에
펄럭이는 살가죽을 여민 몸 속에서
운명을 삿대질하는
알싸한 공복을 다독거린다

연장가방에 단단히 물린 지퍼처럼
어금니를 질근질근 깨문다
손등을 짓찧는 망치질로 하루의 기둥을 세우고
시큰거리는 근육으로 시간을 톱질할 수 있다면
굳은살이 아픔 없이 뜯겨나가는 나날이다

아침 출근에 바쁜 사람들 틈에서
하루의 시간을 접으며
햇살에 축문 적은 소지를 사른다
생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끄덕
발뒤축을 좇는 그림자의 고삐를 끌며
햇무리에 방울소리를 감는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

 

양정동 블루스 / 유정탁

추석 보너스로
동그라미 여섯 개가 통장에 찍히던 날
기숙사 계단을 오르며 얼빠진 표정으로 히죽 웃던
사내의 술 내음이 코끝에 걸렸다
벽돌담 아래 순대 어묵이 그리운 밤
우리는 무 쟁의 특별 목돈을 묶어둔 채
일찌감치 포장마차로 향하고
그날 밤 총총히 순대를 썰던 아줌마
이렇게 일찍 순대가 다 팔려나간 적 없단다
양정동 밤 물결 깊게 흘러도
공장 굴뚝 연기는 목젖으로 흘러들고
먹빛 공간을 지우며 휘파람을 불었다
봄날 부르짖던 함성
공장 구석구석 붉은 녹처럼 묻어나고
둥글게 영그는 달
오늘 더욱 서글픈 빛으로 흘러드는
감옥의 밤도 있는데
백만 원 목돈이 어루만지는 가슴에 술 붓는 버릇만 늘었다
열적게 도망가던 그날
오지 않은 사람들을 원망하며
훈장처럼 남은 발목의 상처로
스스로 위로하던 여린 가슴아
한번쯤 펜을 세우리라, 매운 다짐 뱉던
내 입술의 짧은 오기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합리화시키던 그 말은 굴복이었다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고 있는 거다
낙서처럼 어눌한 양정동 침묵의 가슴에
고성 방가만 휘갈기고
목돈을 주어도 오늘 밤 우리는 시내로 나갈 줄 몰랐다

 

신라문학대상 당선작

 

솟골 / 유행두

솟골엔 재수 없이 둘이만 산다
광대뼈 골 높은 서황댁이랑
뻐드렁니도 없어 밥알 녹여먹는 모동댁이랑
앙살스런 과부 이가 서 말이라고
서황댁 흉보는 모동댁
마늘밭 고랑에서 무릎 시리다 푸념하고
모동댁 아들 없다 무시하는 서황댁
박힌 우물 차지하고 파뿌리 다듬는다
솟골에
솥단지 하나씩 걸어놓고
바람소리에 개 짖으면 서황댁
이민 간 아들 같아 삽작문 밀어보고
구름 내려앉아 도둑고양이 처마 밑 기웃거리면
모동댁
미운 척 밥 한 술 던져준다
아랫동네 염쟁이영감 새끼 꼴 힘이라도 남아 있을 때
죽어야 한다고
속없는 아랫배에 쪼글쪼글한 말 집어넣고
서황댁 모동댁
먼저 죽기 내기한다
메아리도 꼴딱 넘어가지 않는 솟골
서황댁 모동댁
징글징글 산다

 

호연재 여성문학상

 

얼레빗 / 변삼학

팔순 어머니 치아 같다
그 치아 사이로 빗어 내린 머릿결
몇 십리 길로 굽었을까
거울 앞에서 치아와 빗살 가지런할 때
나눈 고달픔, 빗질 사이로 흘렸을 것이다
꽃봉오리처럼 매듭진 비녀머리 풀면
도르르 용수철 같이 흘러내리는 검은머리
빗질 때마다 빠진 머리카락 올올이 거둬
한 움큼이 되면 연필 몇 자루 값으로
달비장수*에게 넘겨줄 때 어머니 세월도
한 움큼씩 닳아 빠져나갔을 것이다

파마를 한 뒤 잘 내리는 솔빗 마다하시고
빗살이 닳고 빠진 너를 놓지 못한 것은
어머니 굴곡진 삶을 약손 같은 빗살의
지압으로 버텨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투박한 연갈색이던 네 몸
漆器처럼 곱게 물든 것은
동백기름 바른 어머니의 검은 머리카락
일생 빗겨주고 받은 새경이었을 것이다
검은색 너에게 오롯이 넘겨주고 남은 흰머리
빗질하는 어머니의 손도 얼레빗이다

*달비장수 - 예전에 가발을 만들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사람

국민카드사 사이버 문학상

 

팽이 / 배영민

그렇게 처도 돌지않았던 팽이
지금은 왜이리 빨리 도는지
소용돌이 어지러움증이 타고 넘는 목젖이 블랙홀이다.
팽이를 만든다고 나무를 깎다 배인 손에
곱게 미여져 나오던 여명의 피가 팽이에 스미고
상처난 손을 보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쇠구슬 박힌
팽이는 아픔도 마취시켰다.
쩡- 쩡-
방죽의 신음 소리에 어머니의 한숨이 잦아들던 날
건너 방 할머니는 왜바람 타고 떠났고
결빙된 방죽에서 팽이는 돌기 시작했다.
맞아야 돌고 돌아야 설 줄 알았던 팽이
쇠구슬은 귀에 딱지가 붙도록 일러주시던
아버지의 세상이었고 중심 축이었다.
나무 나이테로 그려진 색상들이
경계선을 지키며 세상을 돌리던
청보리 단풍들던 계절에도 지구는 돌고
돌고있는 팽이에 채칙은 중심 흔들리는 파괴였다.
철없이 반항했던 젊은 시절의 가출이었다.
벌건 아픔에
벌건 아픔을 아파야 피워낼 수 있는 파란불꽃
불꽃속에서 흔들거리며 팽이가 춤을 춘다.
맞아야 돌줄 아는 팽이
아들의 팽이는 채찍이 필요 없는 스프링식이어서
아버지의 쇠구슬은 필요없었다.
세월의 길이만큼 짧아지고 낡아버린 채찍과 팽이
파란 불꽃 핀 하늘에서 조심스럽게 구름으로 흘러간다.

 

동서커피문학상

 

바느질 / 조혜경

눈내리는 소리가 장독대를 걸어다녔다
문살에 기댄 눈이 살며시 잦아드는
창호지를 한 번씩 바라보면서
어머니와 함께 하던 바느질
틀어온 솜은 첫눈처럼 고왔다
아버지의 회색 겹바지는
바람소리가 지날 때마다 뚱뚱해졌다
늘 하얀 실밥이 묻어있던 어머니의 머리카락,
나는 이제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기워야 할 것보다 버려야 할 것이 많아진 나이
제가 가진 배터리의 양보다 늘 과부하된 하루를
소파에 부려놓고 잠든,
남편의 양말 엄지발가락 부분이 뚫려있다
남편의 술 냄새로 거실이 이내 텁텁해지고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 반갑게 기어 나온다
양말을 벗겨 올이 풀린 곳을 본다
그냥 꿰매기는 뚫린 자리가 너무 큰데
덧댈 양말조각이 없다
바느질 몇 땀에 일그러지는 엄지발가락자리
솔기가 신발에 부딪치면 불편하리라
아이들의 꿈 속, 가장 부드러운 한토막을 떼어
덧대어 본다
내일은 왼쪽 오른쪽을 바꿔 신으라고 해야할지,
남편의 잠이 너무 깊다

 

웅진문학상

 

중이염 / 정용기

나이 40을 불혹이라고 배웠다
그 무엇에도 혹되지 않으려고
내 몸은 폐허처럼 살았다
귀 닫고 눈감고 점자로 된 시간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은 춥고 비루하고 적막했다
꽃샘추위가 밀어닥치고 몸은 건조하여
밤에는 내 등뼈 위로 불길이 타올랐다
성긴 봄눈도 불길을 막지 못했다
코와 귀와 목으로 불땀이 지나면서
내 몸을 빌어 겨울과 봄이 드잡이를 하곤 했다
내 귀는 밖의 나무들과 내통했다
나뭇가지마다 숨죽인 함성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물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비릿한 시간들이 몰려온다
몸 구석구석 꽃봉우리가 맺힐 모양이다
귀가 무겁다

세아뜨 문학상

 

엘레빗 / 김병수

생긴게 흡사 다 먹고 남은 생선 가시 같다

저 생선 가시 사이로 빗어 내린 머리카락만 무수하다

사주단자 속에 담겨 시집오던 그 첫날밤부터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지금
굽은 등에 담긴 이야기 빗질하며 나눴을 터

얼레빗 모난이가 머리에 수지침을 놓던 이유는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설움을 아는 것이다

비녀를 뽑으면 굴곡진 머리카락
정갈하게 빗어 내리는 것은
저 흰 머리카락만이라도 펴주고 싶어서다

굽어진 등 골다공증 척추의 모난이가 안쓰러웠던 거다

도마에서 썰고 다지고 넣은 새벽
방망이질에 새어나오는 땟국물
침침한 눈으로 꿰매고 휘감고 시침질해
토닥토닥 다듬이질해 곱게 포개던
굳은살 배긴 손을 기억하고 있는 거다

얼레빗이 검은 머리카락 검은 색을 죄다 빨아먹어
싸락눈이 허옇게 머리에 내려앉았다

흰 머리카락이라도 많아야
굴곡진 척추 펼 수 있다고
어머니, 대청 마루에 앉아 얼레빗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굽은 머리카락, 굽은 등, 굽은 이마 주름살,
굽은 마음까지 정갈하게 빗어 내리고 있다

얼레빗 한 켠에 새겨진 낙화
어린 손녀 무릎에 앉혀 빗질을 해주고 있던 할머니

 

지용문학상

 

대작(對酌) / 현택훈

 

국밥에 소주를 마시니

새벽별이 떴다야

택실 기다리는 저 사람들도

노래 소리가 작아졌군

가로등은 너무 밝아서

고갤 숙이고 있는 것 같아

달리는 새벽바람이

아침신문을 스치네

너는 날 다시

새벽으로 데리고 왔어야

등 굽은 청소미화원은

수도승처럼 거룩하지 않은가

 

국밥집 유리창 앞에 앉은

새벽 거리가 내게

눈물 같은

소주를 또 붓고,

 

지용문학상

 

나무는 / 김점순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가만히 그 속으로 따라가 본다
이파리가 흔들리기까지
먼저 가지가, 줄기가
뿌리를 묻고 있는 저 땅이
얼마나 많은 날을 삭아내려야 했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것 뒤에는 언제나
아프게 견딘 세월이 감춰져 있는 것을

푸르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
허공으로 길 하나 내기 위해
초승달 돋은 하늘에 가슴을 풀어놓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돌아앉아 숨 고르는 소리에
발 아래가 술렁거리고, 서쪽 하늘로
수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그러면서 나무는
제 한숨을
나이테 속에 꼭꼭 태워 넣고 섰을 뿐

 

이수문학상

 

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3분 동안 / 최정례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빨간 다라이 / 최정례

외갓집은 도라지 꽃밭 위에 없다
외갓집은 지금
부흥수퍼 전망부동산 위 3층에 있다
북두칠성 아래 감나무와 수국나무 사이
우물도 없다
그 자리엔 흑장미비디오가 있다
외삼촌은 빚더미 위에 있고
장턱거리 밭은 가압류 중이고
구불거렸던 길은 곧게 펴졌다
외갓집은 지금 서기 2000년이고
부엌엔 김치냉장고와 정수기가 있고
엿 밥풀강정 술지게미 따위는 없다
잔칫집에서 술 취해 들어오다
얼어 죽었다는 애꾸 김석출
때문에 무서워 외면하고 건너뛰던
도랑은 사라졌다
아라비아식 지붕을 모차처럼 올려놓은
모텔이 서 있다
방앗간은 연성공업사가 되었고
간판엔 이렇게 써 있다
각종 플라스틱 통
저수조 물탱크 함지박 빨간 다라이 개집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 최정례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개 있다
빠리바게뜨,엠마
김창근베이커리,신라당,뚜레주르

빠리바게뜨에서는 쿠폰을 주고
엠마는 간판이 크고
김창근베이커리는 유통기한
다 된 빵을 덤을 준다
신라당은 오래되서
뚜레주르는 친절이 지나쳐서

그래서
나는 빠리바게뜨에 가고
나도 모르게 엠마에도 간다
미장원 냄새가 싫어서 빠르게 지나치면
김창근베이커리가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었는데
하면서 신라당을 가고
무심코 뚜레주르도 가게 된다

밥 먹기 싫어서 빵을 사고
애들한테도
간단하게 빵 먹어라 한다

우리 동네엔 교회가 여섯이다
형님은 고3 딸 때문에 새벽교회를 다니고
윤희 엄마는 병들어 복음교회를 가고
은영이는 성가대 지휘자라서 주말엔 없다
넌 뭘 믿고 교회에 안 가냐고
겸손하라고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라며
내 귀에 테이프를 꽂아놓는다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깃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그렇다
살 수 밖에 없다

 

백석문학상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록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접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한국시협상

 

벙어리장갑 / 오탁번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애지문학상

 

동그라미 /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
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o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 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현대시 동인상

 

감자의 몸 /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될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길상호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출처, 네이버카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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