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상미 시모음 1 본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외 8편으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세계사 1993)
검은, 소나기떼(세계사 1997)
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 시작 2003)
산문집, 1998년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생각하는 백성)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오늘의 책 2000)
2003년 10월 9일 '오렌지' 외 4편으로 <박인환 문학상> 수상
즐거운 공모
내 위장은 머리 위에 있습니다.
두뇌보다 한 층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나는 위장을 위해 날마다 조금씩
두뇌를 뜯어내어 팝니다.
위장은 너무나도 자기생존에 철저하여
조금만 어긋나도 악랄하기가 그지없어
나는 두뇌를 판 돈으로 <밥>을 사서
고스란히 그에게 상납합니다.
두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3인칭으로 만들 수 있고
몇 날 며칠을 굶길 수도 있지만
위장은 1인칭 외엔 어떤 것도 될 수 없으며
단 하루를 굶겨도 난리가 납니다
하여 나는 남의 두뇌를 훔쳐서라도
위장의 배는 든든히 채워 놓습니다.
그래야만 불시에 위장의 간섭이나 습격 받지 않고
내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위장이 모르는 내 영혼을
훨훨 어디든 날아다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들레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날 찾아가 보면, 어느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 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개죽음
개죽음은 개의 죽음이 아니다
개죽음은 개같이 죽는 것이다
어느날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
혼자서 느긋이 술집에 앉아
모처럼 흐뭇한 휴식 취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뒷머리에 타타탕!
이유없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넘어지는 것
그게 개죽음이다.
아무도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 시대의 불운
개죽음은 도처에서 장소 불문하고
우리들에게 끼여든다
그것 피할 안전지대는 더이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모두 제로이다
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빨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고래 사냥
내 마음의 해도(海圖)를 주마.
바다로 나가거라.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책과 수평선이 주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저 멀리, 나와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들과의
참신한 방황에 나 자신을 맡겨버렸다.
바다로 나가거라.
빛나는 꿈 한 자루 입에 물고
뱃머리에 노련한 작살을 정착한 채
고래를 향해 노를 저어가라.
격렬한 폭풍파도는 네 존재를 알게 해주리라.
무섭도록 격렬하고 깊은 것일수록
서로를 잘 이해하기 마련이다.
바다로 나가거라.
너를 기다리는 고래의 함성에
저 깊은 바닷속 죽은 선원들의 무덤이 저절로 열리리라.
가거라, 폭풍파도가 너를 기다린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배처럼
떠나거라.
가서 보아라.
그 어떤 인간의 야망보다도 더 장렬하게
네가 던진 작살 끝에 묻히는 고래의 피를!
그 피묻은 장엄한 공포를!
그리고 그 모든 걸 삼키고도 지구의 3분의 2를 덮고 있는
바다의 저 불가사의한 경의를!
시인앨범3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화장
나는 날마다 화장을 한다
서른을 넘기면서
더 아름다워진 여자의 속살에도
후로랄 향수를 뿌린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맑은 눈물샘에도
산스타 한 방울 떨어뜨린다
거울 속의 내가 울고 있구나
거울 밖의 나는
모래처럼 바싹바싹 흩날리는데
거울 속의 나는 호수 위에 내려앉은
꽃잎 같구나
나는 날마다 화장을 한다
세상에 믿을 것은 거울뿐인가
나와 내가 마주앉아 벗겨내는
운명의 껍질이
새빨간 입술 끝에 그늘을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신음하던
내용이
화장한 내 모습 속에서
활짝 열리고 있다
나는 날마다 화장을 한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비밀
애인을 가슴에서 꺼내 벽에 걸어두니 참으로 조용하다.
벽에 걸린 벽의 침묵이 세속과 다른 냄새를 애인에게 발
산하여 애인은 지금 한창 침묵중이다.
침묵이란 본래 심장 가까이 두는 물건이라 맛만 들이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깊은 맛을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침전해 있던 애인이 어
느날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과 얼음의 우화 따위
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안은 금세 격동으로 치닫는다.
저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해류에 휘감겨 십자
가에 매달리듯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마치 그 속에서 정화되어 다시 솟는 분출만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오후 세시
오후 세 시의 정적을 견딜 수 없다
오후 세 시가 되면 모든 것 속에서 내가 소음이 된다
로브 그리예의 소설을 읽고 있을 때처럼
의식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라 주변을 어지럽힌다
낮 속의 밤
똑 똑 똑
정적이 정적을 유혹하고
권태 혹은 반쯤은 절망을 닮은 멜로디가
문을 두드린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무섭게 파고드는 오후 세 시의 적막을 견디지 못해
차를 끓인다
너 또한 그렇다
부주의로 허공 속에 찻잔을 떨어뜨린다 해도
순환의 날카로운 기습에 눌려
내면 깊이에서 원하는 대로
차를 마실 것이다
공약할 수도 훼손시킬 수도 없는
오후 세 시의 적막
누군가가 일어나 그 순간에 의탁시킨
의식의 후유증을 턴다
그러나 그건 제스처에 불과하다
오후 세 시는 지나간다
읽고 있던 책의 한 페이지를 덮을 때처럼
뚝딱 뚝딱 뚝딱 ......
그렇게 오후 세 시는 지나간다
정적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정적 또한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의 차임벨소리에 놀라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우리 자신의 내부,
그 끝없는 적막의 두께뿐이다
즐거운 사랑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평안하게
언젠가는 질 꽃인 줄 알았기에
허망하듯
부드럽게 옷을 벗었다
잠자지도 않고 밤에도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아득하게
값싼 집일수록 불친절하므로
구월의 밤바다에선
모래 위에 집을 짓지도 않았다
아무도 내게서 떼어놓지 않고도
남극의 빙산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를 녹였다
투명한 높은 생각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낮게 낮게 마주치는 사고와
그 사고 밑의 욕심을 탐하지도 않았다
헛되이 웅크리지 않고
내사랑, 매달리는 그 아래
즐겁게 즐겁게 누워만 있었다
참 순진하게
참 겸허하게
사랑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눈속임
나는 띄엄띄엄 산다
살지 않을 때는 책 속에 들어가 논다
책 속에 오래 들어가 있다 나오면
책 밖에서 바쁘게 돌아가던 사람들이 무섭게 화를 낸다
나를 아무 것도 모르는 저능아 취급을 한다
그래도 나는 띄엄띄엄 사는 내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때때로 세상은 나를 지배하지만
나는 세상엔 관심이 없다
지배는 구속보다 더 냉혹하다
냉혹은 내가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냉혹이란, 인정이 없이 가혹함을 말한다
가혹이란, 몹시 까다롭고 혹독함을 말한다
냉혹과 가혹함이란 인간에게보다는 짐승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배고픈 야생 고양이가 어두운 쓰레기통을 뒤지다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후다닥 내 가슴에 꽂을 때마다
세상에 대한 격렬한 슬픔에 소스라쳐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이 집 저 집을 뒤지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상심케 하지 못한다
나는 띄엄띄엄 산다
하루 종일 책 속에 들어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애가 되기도 하고
일흔 살 노인으로 훌쭉 건너뛰기도 한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집필자보다 덩 영특하게
어떤 물음표도 나를 향해 던지지 않을 때!
에덴의 동쪽
나는 나를 소홀히하지 않았기에
남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디는 곳마다 생쥐투성이
세상에 생쥐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위에도
생쥐들의 세미나 생쥐들의 축제
자동차 뒷좌석에 쌓아놓은 책 위에도
여기저기 심어둔 사랑에도
이 시대의 검은 낭만을 연주해대는 생쥐투성이
내 머릿속 생각들을 훔쳐 갉아먹는 생쥐투성이
미로처럼 길게 줄을 서서 모여들고 있다
마네의 선착장에도 모네의 정원에도
쇠라의 그랑자트 섬에도 오치균의 사북에도
바람은 불어오지 않고 생쥐 떼들이
태양과 달을 희롱하며 숨바꼭질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하다, 생쥐들이여,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주사위를 던진다
그리고 그 주사위는 슬픔도 백일몽도 아니다
생방송으로 미친 듯이 울어대는 너희들의 아첨이
눈부셔, 눈이 부셔
너희들에게서 아주 멀어진 이야기들이다
내 이야기에 너희들의 웃음을 섞지 마라
너희들의 눈물도 섞지 마라
나는 내 이야기들로 너희들에게 어떤 덫도 놓지 않았다
나는 태양과 달 아래를 달리고 달려
지금도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내 발 끝에 걸린 검은 구름조각들이
너희들의 집 한가운데 켜 있는 불을 꺼뜨리고
너희들의 침대를 텅 비게 만드는 건
내가 에덴의 동쪽에서 태어나
아직도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내 발자국들을 기억하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잡초처럼 다가오는
너희들이 아니고서!
질투
옆집 작은 꽃밭의 채송화를 보세요
저리도 쬐그만 웃음들로 가득 찬
저리도 자유로운 흔들림
맑은 전율들
내 속에 있는 기쁨도
내 속에 있는 슬픔도
태양 아래 그냥 내버려두면
저렇듯 소박한 한 덩어리 작품이 될까요?
저렇듯 싱그러운 생 자체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