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남진우 시모음 본문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 당선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평론집 <신성한 숲>, <바벨탑의 언어>, <숲으로 된 성벽>,
<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
산문집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작업은 시라고 하였다>
대한민국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몇닢 은전과 함께 외출하였다.
목조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쾌감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시를
태워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헝가리언 랩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말에 펼쳐진 12사도의 눈꺼풀에
주기도문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대명사.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랑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오른다. 흐느적거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이는 잠의 음계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 소리,
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달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혼수로부터 꿈을 길어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을 켜고 기다리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지중해의
녹색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자정이 되면 샤갈과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雪海林.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선박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밤안개가 걷히겠지요. 바람부는 해안 푸른 고요 속에 목
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자정의 해안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유년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지상의 모든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런 날
그런 날
하루 종일 바람은 불고
마음은 천장 구석의 얼룩을 따라 한없이 번져가고 싶은 오후
뒷문 덜컹이는 소리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고
느지막이 몸 일으켜 창문을 열면
가로수와 전깃줄 사이를 헤매는 눈송이가 보이고
두터운 옷 뒤집어쓴 사람들 느릿느릿 거리를 지나쳐 가고
하염없이 시간은 흐르고
아무도 내게 전화조차 걸어오지 않는 그런 날
옆집 옥상의 언 빨래들 문득 펄럭이다 그칠 때
창밖을 휘날리는 눈발 속을 걸어오는
하얀 눈사람이 보이고
어느덧 방 안에 들어온 눈사람이
눈웃음 지으며 다가오고 창밖 하늘에 부서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저물녘
방을 가득 채운 채 하얗게 웃고 있는 눈사람 앞에서
나 또한 멀거니 웃고만 있는 그런 날
오래고 오랜 나날 먼 길을 굴러오며 커다래진 눈사람도
차츰 녹아가고
내 발밑을 적시며 흐르는 눈사람의 물 앞에서
나 아무리 도리질해보지만
나도 어느 날 길 떠나
어느 누구 앞에 눈사람 되어 서고 싶은 그런 날
뒷문 덜컹이는 소리에 종일토록 마음은 붐비고
일각수
단 하나의 뿔로
너는 내 가슴을 들이박고
안개 자욱한 새벽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두 손으로 받으며
나는 망연히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너를 들이박은 적 있었지
그때 벌어진 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어떤 영혼의 갈증을 적셔주었던가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려 손을 넘쳐흐르고
나는 아물지 않는 상처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새알 같은 심장을 어루만진다
다시 거듭 둔중하게 내 가슴에 와 박히는
뿔, 뿔, 뿔들
조등
장례식장에 걸린 조등 하나
바람도 없는데 잠시 흔들리다 멈춘다
죽은 이의 입김이 스쳐 지나간 걸까
죽은 이의 눈빛이 머물다 간 걸까
산 사람들만이 부산히 오가는 장례식장 입구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조등 하나
누군가에게 전할 말이 생각난 듯
잠시 흔들리다 멈춘다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년 문학과지성사)
지구 최후의 날
지구 최후의 날
지구는 오히려 평안하다
인간들이 모두 외출해버린 땅 위에
풀과 나무들 짐승들이 정겹게 어울리고 있다
넘치도록 다사로운
햇살 아래 졸고 있는 미풍
옛 책에 이르기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문학과 사회(2000년 겨울호)
저녁빛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붉은빛으로 내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력이 끝났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연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빛에 잠겨
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기울이네……
부서진 꿈들……
시간의 무늬처럼 어른대는 유리 저편 풍경들……
어스름이 다가오는 창가에 서서
붉은 저녁해에 뺨 부비는
먼 들판 잎사귀들 들끓는 소리 엿들으며
나
잠시 빈집을 감도는 적막에 몸을 주네……
종일토록
꽃게 한 마리
거품을 물고 꽃그늘 속으로 기어간다
꽃게 거품에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가 피워내는 꽃들이 바다를 덮는다
툭, 꽃 모가지가 떨어지고
투둑, 꽃게 다리가 부러진다
져 내리는 꽃잎 속에 꽃게 거품이 떠오르고
허공에 뜬 거품마다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 한 마리 바다를 물고
꽃그늘 속에서 기어나온다
한 세월 아득한 꽃 소식 기다리며
갯벌을 건너가는 꽃게 한 마리
새벽 세 시의 사자 한마리
지금
목마른 사자 한마리 내 방 문 앞에 와 있다
어둠에 잠긴 사방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잠자리에 누운 내 심장에 와 부딪히고
창 가득히 밀려온 밤하늘엔 별 하나 없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타오르는 사자의 눈이 내 눈에 가득 차고
사나운 사자의 앞발이 내 목줄기를 짓누를 때
천둥처럼 전신에 와 부딪는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두운 복도 저편
막 사라지는 사자의 꼬리가 보인다
월식
달을 따기 위해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간 아이와
달을 건지기 위해
두레박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간
아이가
이 밤
저 달에서 만나 서로 손을 맞잡는다
우물에 떠 있는 달 속으로
지금 막 올라간 아이가
달을 따 들고
지붕 밑으로 내려온다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지상의 양식
낯선 바람
서녘에서 불어오고
집 없는 나 텅빈 네거리에 서서
너를 찾는다
바다가 밀려와 땅을 뒤덮어도
붉은 꽃들 사방에서 피어나 손짓하니
징역의 시절들
어지러운 꿈자리에 시달리던 밤은 끝났다
어디에 있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날 선 돌멩이 들어 나를 찍던 사람은
어질머리 흔들어도 푸르름 변치 않고
손가락 끝을 아무리 깨물어도
새는 울지 않고
나 아프고 괴로우니
탁발승처럼 맨발로 먼 길 걷고 걸어
너 사는 집 앞에 벌 받는 자세로 서 있어도
그 누구 하나 아는 체하지 않는다
눈먼 바람은 여전히 서녘에서 불어오고
붉은 꽃들 사정없이 피어나 나를 쫓아와도
나 외롭고 슬프니
내가 지상에 토하고 가는 한 모금의 피
내가 하늘 아래 남기고 가는 한 줌의 살
먹고 마시라
이 시절 다 가기 전에
긴 가뭄 큰물이 번갈아 찾아오리니
너 찾아가는 길
세상은 어느덧 저물어간다
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
저수지의 개들
비 내리는 밤
저수지 밑에서 개들이 짖는다
흙탕물 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음소리
긴 혀를 늘어뜨리고
두 눈에 푸른 불을 켠 개들이
발톱으로 서로의 목줄기를 찢으며 짖어댄다
짖어댄다 소용돌이치는 저수지 밑
진흙탕을 달리며
일찍이 지상에서 쓸려나가
저 어두운 물속에 갇힌 온갖 소리들이
물길과 물결사이
허연 잇자국을 드러내며 거품을 뿜어낸다
물에 불은 주검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면 위
부우연 숲 그림자를 흔들며 번져가는 울음소리
밧줄을 내려주어도 저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오직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짖어댈 뿐
일렁이는 수초 사이에서 뒤엉켜 싸우면서
저들은 밤새 금 간 제방을 물어뜯는다
우리가 버린 말
우리가 욕하고 더럽히고 깨트린 말들이
폭풍우 치는 밤
저렇게 어두운 물 밑에서 하염없이 짖어대고 있다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