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남진우 시모음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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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12. 15. 00:48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 당선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평론집 <신성한 숲>, <바벨탑의 언어>, <숲으로 된 성벽>,

<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

산문집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작업은 시라고 하였다>

대한민국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 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입 속에 녹아내리는 불꽃 하나 만들어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속삭여도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냐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집 지붕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이 있다
뚜벅뚜벅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당신의 불안 한 잠에 큰 발자국을 찍어놓는 사람이 있다

어둠에 잠긴 마당과
달빛 소용돌이치는 허공을 번갈아 쳐다보며
간혹 먼데서 들리는 기적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하면서
그는 밤새도록 지붕 위를 거닌다

점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당신은 본다, 두 팔 벌리고 지붕 위에 서서
먼 하늘 우러르는 그의 모습을
그의 몸을 감싸는 눈부신 달빛속에서
피어나는 겹겹의 꽃잎

둥근 달 속에서 잠자는 당신이 비치고
지상엔 깨어있는 그 홀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일다 스러질 때 마다 문득 드러나는
그의 고요한 얼굴

당신이 잠든 사이
세상도 잠들고 당신이 깨어나는 순간
그는 사라진다 이른 아침
낡은 지붕위에 날아와 앉는 새들만
속절없이 그의 이름을 지저귀다 갈 뿐

 

2001년 작가세계 여름호

 

저 석양


1

저녁

내 몸은 푸른 허기로 가득 찬다

바람의 비린내가 맡아지고

손가락 뼈마디에 와 걸리는 녹슨 석양빛이 만져지는 때

오래된 마당 구석 낡은 우물이 들어와 마음 한 켠을 차지한다

 

내 안에 기숙하던 아픔이 이리도 많아

오늘 이 저녁 만나는 모든 것들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내 갈 길을 묻는다

 

2

한때 내 속에 살던 노래는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는 텅 빈 우물로 고요하다

푸른 물이 그립다고 간혹 되뇌어보지만

이제 누가 내 속에

제 얼굴을 비춰볼 것인가

 

춥고 어두운 내 몸속에

간혹 길 잃은 짐승이 빠져 한 줌 뼈로 변한다

내가 길들일 수 없는 길들이

저 먼 세상 어디론가 소리 없이 풀려나가고

길의 끝

마른번개 한줄기 달려가다 멈추는 곳

 

푸른 허기에 감싸인 채

나는 우물을 굽어본다

지팡이가 돌계단을 치는 소리 들리다 그치고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3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빛

날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깃을 터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아무 맛도 없이

내 몸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라지는

 

문밖에서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다가왔고

잠시의 맑은 날 끝엔 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즐비한 술집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신문과 전파는 무심히 붐비는 사람 틈새로 빠져나갔고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갔다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지루한 것들뿐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막막한 세월을

유행 따라 머리 길이를 조절하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지급된 구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누추한 그림자를 끌고서 혀 밑에 쌓인 소금과 재를 맛보며

오래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미 내 삶은 유적지를 적시는 메마른 빗방울이었고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으므로

길 잃은 소녀의 울음도 장님의 호각 소리도

내 깊은 적막을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자객처럼

하나씩 증발해버리는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아침이면 사나운 새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고

저녁이면 어두운 카페에서 낯선 이국 가수의 목소리가

부우연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밤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습경보는 울려 퍼지고

추적자는 문을 두드리는데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시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피가 솟구치는

어두컴컴한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막다른 골목을 헤맨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자의 외마디 외에

이 지상에서 더 들을 말이 뭐가 있는가

흑색 소설에서 모든 것은 해결된다

사람은 태어나 꿈틀대다 덧없이 죽어가는 것

흑색 소설을 읽으며 오늘도 나는 확인한다

모든 길 끝엔 파헤쳐진 무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사방에서 권총이 불을 뿜고

어두운 술집에서 더러운 화장실에서

으슥한 뒷마당 주차장 지하실에서

사내들은 차례로 쓰러진다 적막한

 

먼지 속의 속삭임

 

먼지의 세월이었다
어디서나 먼지가 날아올랐고 손에 닿는 무엇이든
먼지가 되어 부서져내렸다. 먼지 속에서
먼지를 마시며 먼지로 되어가는

거리엔 먼지만큼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고
먼지가 두텁게 쌓인 서류철엔
조만간 먼지가 될 글씨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먼지. 먼지의 세월이었다

모자를 털고 옷과 구두를 털고
사람들은 집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직장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먼지가 되기 싫은 표정으로
한입 가득 먼지를 물고서

티브이를 켜도 화면 가득 먼지가 직직거리고
신문을 펼치면 부우연 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먼지에 덮인 음식을 먹고 먼지 쌓인 침대에서
먼지끼리 서로 부둥켜안고서 필사적으로
우린 더 이상 먼지가 아니야 되뇌면서

먼지의 세월이었다
춤추는 먼지 속을 연신 쿨룩이며 사람들은
지나갔다 부지런히 먼지를 토해내며
사방 가득히 안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먼지속에서
먼지뿐인 죽음이 만져졌다

  

 

그 새벽
나는 사과나무 아래 서 있었다

휘어진 가지마다
붉게 익은 심장이 마악 솟아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번
뜩이고
어둠에서 풀려나온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들이 후두
둑 내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디에도 과수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반쯤 무너진 황폐한 돌담 옆으로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늘어서 있는 사과나무들
거기 두근두근 열린 태양의 과실들

나는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땄다
내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
붉고
동그란
심장
한입 가득 그것을 베어 물자
어디선가 맹렬히 타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이지 않던 새들이 깃을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새벽 내가 서 있는 곳은
우물가였다 나는 마른 우물 바닥 저 밑에서 홀로
붉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11월의 마지막 날

 
안개가 내린다

 

누군가 기침을 하며 긴 골목을 빠져나간다 늙은 말이 끄는 수레가 덜컹거리며 자갈길을 지나간다 저녁 공원으로 가는 길이 서서히 휘어져 언덕에 닿고 수렁에 처박힌 자전거 바퀴가 오래 헛돌다 그친다

 

안개가 내린다

 

짙은 모과 향기 속에 눈뜨는 별들 어둠 속에서 물은 쓰디쓴 적막처럼 흐르고 인적 그친 놀이터의 그네줄이 몇번 흔들리다 만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누가 죽었다는 엽서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안개가 내린다

 

부엌에서 아낙네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굴뚝을 타고 마을 위를 한 바퀴 휘돈다 그을음 낀 벽에 젖어드는 망치소리 누구의 관에 못을 박는 걸까 그리고 저 아련한 휘파람소리는

 

굴렁쇠를 굴리며 아이들이 먼 나라에서 돌아오고 있다

 

연꽃 둘레를 돌며

 
그 여름날 밤 나는
연꽃 위에 서 있었다 연꽃은
아득히 수평선 너머까지 그 너른
잎사귀를 펼치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나는 연꽃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돌았을 때
달이 지고 둥근 해가 떠올랐다
나는 연꽃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
지난밤 나와 함께 연꽃을 돌던 은하의
별들도 다 내 몸 속으로 들어와
같이 잠들었다

 

이 바람은 잠자는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는
이 바람은 누구의 입김일까 별들은
내 몸 속에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연꽃은 물살 따라
고요히 흔들리고

 

이윽고 나는 깨어났다
서서히 해가 맞은편 연꽃 아래로
지고 있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
대기는 물처럼 푸르고 투명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달이 떠올랐을 때 다시
나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함께
연꽃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마른 연못


수풀 한가운데 마른 연못이 있다 햇빛이 찰랑거리듯 넘치는 여름 오후 마른 연못 위로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올랐다

 

……어쩌면 꿈인지도 모른다
한 마리 나비가 연꽃 둘레를 날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소녀는 돌을 던지고

 

돌은 마른 연못 한가운데 연꽃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구름이 지나가고 소녀의 이마는 맑은 그늘에 젖는다 나비는 끝없이 그녀의 눈동자 주위를 맴도는데

 

마른 연못은 점점 깊어져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수풀은 더욱 푸르러가고 소녀는 꿈결인 듯 자기 몸 위로 떨어져내리는 나뭇잎을 쓸어모은다

 

서서히 기우는 햇살 따라 수풀도 저물어가고 마른 연못은 조금씩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서서히 시들어가는 연꽃 나비도 힘없이 날개를 접고 소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으면

 

이윽고
마른 연못 저 밑에서 향기로운 어둠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한여름밤의 꿈

 

숲 가운데 나는 누워 있다

푸른 잎과 줄기로 가려진 밤하늘

달은 조심스레 단지를 기울여

내 입술에 투명한 젖을 붓는다

내 포근한 잠 속으로 스며드는 달빛

 

무리지어 흐르는 개똥벌레의 물결을 지나

바람은 불켜진 꽃을 향하여

활을 당기고 하나씩 별이 밝혀준 등불을

들고서 젊은 여인들이 이슬 속에서

걸어나온다

 

둥글게 부풀어오르는 달 꿈꾸듯

나를 둘러싸고 춤추는 젊은 여인들

달이 천천히 돌아가며

숲 가득히 빛을 뿌리는 데 따라

 

젊은 여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다

짐승들도 따라서 돌기 시작한다

 

달이 도는 밤큼

지상엔 젊은 여인들이 돈다

원이 차츰 넓어져서 부풀어오르는 달의

원과 겹쳐진다 서서히

상대방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점점 밝아지는 숲

이윽고 완전한 하나가 될 때

이글거리는 빛에 휩싸여 나는

솟아오른다 저 멀리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는 모습을 찾아

 

불새

  

타오르는 불 속에
내가 서 있다 끝없는 사막엔
바람만이 모래기둥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불어오고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아득한 지평선 신기루처럼
움직이는 낙타의 행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굶주린 까마귀 몇 마리
머리 위를 선회하고

 

서서히 나는 호흡을 멈춘다
서서히 나는 피의 순환을 멈춘다
그리고 두 눈을 태양에 고정시킨 채
불을 빨아들인다 내 혈관을 타고
흘러드는 불꽃들

 

내 심장은 터질 듯 부풀어오르고
태양이 오므렸던 꽃잎을 펼치며
사방에 투명한 빛의 침을 박는다
마지막 한 모금의 불까지 다 마셔버린
다음 나는 기다린다 무릎을 꿇고서

 

심장 속에서 무언가가
날개를 파닥인다 처음엔 조용히
점점 세차게 나는 눈을 감는다 순간
금빛 발톱으로 내 가슴을 찢고 날아오르는
불새 한 마리

 

태양의 중심을 향해
새는 날아가고 나는 재가 되어
사막 위에 쓰러진다 잠시 후 바람이
아득한 지평선 너머 먼 나라로
나를 데려다주기까지

 

나는 너를 종달새라 부른다

 

오 아름다운 나의 날개여

나는 너를 종달새라 부른다 그러면 너는

두 날개에 하늘을 가득 싣고 날아오른다

점점 높아지는 하늘 짙어지는 푸르름

소나무숲은 내게 솔방울을 주었다 솔방울을

주우며 나는 산길을 오른다 새벽은 눈부신 손님

말 탄 기사처럼 지평선을 넘어 힘차게 달려오고

너는 아직 봄의 정상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오 아름다운 나의 날개여

날아올라라 내가 잃어버린 날개를 대신 달고

화살보다 더 빨리 이 땅을 벗어나 메아리

울려퍼지는 환한 햇살을 지상 가득히 뿌려다오

 

깊은 숲 오솔길을 지나 2

 
뿔을 감춘 달팽이 뒤를 따라가면
조용히 열리는 오솔길
달은 둥근 이슬을 한 방울
내 이마에 떨어뜨린다
졸고 있는 언덕의 눈썹 사이로
양떼를 가득 실은 구름이 지나가는 저녁
조심스레 벌어지는
꽃봉오리 속에서 은빛 가루를
날리며 타 죽는 나방이들
잎사귀는 바람이 외우는 주문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간다

 

 우물 이야기

                                                        

  저녁이 되면

  그 우물은 우우 낮게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자욱한 안개가 들판을 지나 우리집 마당으로 스며들 때

  집 뒤안에 버려진 마른 우물 속에서

  느릿느릿 풀려나오던 어둠

 

  아무도 그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저녁 밥상에 모인 식구들은 부지런히 숟가락질만 할 뿐

  어둠이 짙어갈수록

  우물이 내는 울음소리는 더 깊어지고

 

  근심 어린 얼굴빛으로 등불 아래 모여

  식구들은 짐짓 먼 바다를 떠도는 새 얘기에 정신을 쏟곤 했다

  흙으로 메워버린 그 우물 속에 어떤

  잠들지 못한 넋이 있어 저녁마다 그토록 울음 우는 것인지

 

  문풍지 떠는 소리와 함께 꿈속으로 잦아들면

  멀리 불빛 깜박이는 안개 속 마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에

  여기저기 뒹구는 시체들 사람들은 차례로

  우물 속에 몸을 던지고 서서히 집과 숲은

  어둠 속에 묻혀갔다.

 

  저녁이 되어도

  이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우물 옆에 서서

  나는 안개가 몰려오는 먼 들판을 바라본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남자들

  목을 매고 나무에 매달린 여인들

 

  이 밤

  내 꿈속의 우물은 피로 물들 것이다

 

남회귀선

 

내 눈꺼풀을 젖히고

종달새는 솟아오른다

새벽의 긴 속눈썹에 반짝이는

아침이슬 여왕벌은 능금처럼 빛나는

태양 주위를 돈다

지평선

         과일나무

                     구름의 물결

바람이 쏘아오린 화살을 따라

대지 가득 쌓여 있는 빛을 길어올리는

         메아리 소리

 

내 이마 위에 새겨진 일곱 개의 별!


음유시인

 

오 눈먼 사수여

그대 이마 위 빛나는 태양을 쏘라

금빛 꿀벌들이 바쁘게 오가는

정오, 흰 갈기의 바람이

양떼구름을 몰고 가버리기 전에

무르익은 여름을 맛볼 수 있도록

갈라진 석류에서 뜨거운 샘이

끝없이 솟구쳐오르도록

 

잠자는 바다

 

나무 그늘 아래
잠든 여인이 누워 있다 그녀 숨소리 따라
조금씩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살며시 내려앉는
안개와 새 울음소리

머얼리 바닷물은 부풀어 올라
둥근 달을 낳고 달은 소나무 향기를
대기 가득히 풀어 놓는다 푸르른
바람 한줄기 그녀 입술을 스칠 때

누군가 촛불을 켜 들고
우물 밑으로 내려간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 밑 잎사귀들은 쌓이고
달빛은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는 피를 따라
어두운 숲으로 흘러간다

흘러간다 서서히 밤하늘을 적시며

... 이 밤 그들은 뗏목을 타고 사나운 밤바다를 건너가리라
... 조금씩 가라앉은 수평선 너머 폭퐁우는 그들을 기다리고
... 이 밤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섬을 찾아 헤매리라

점점 자욱해지는 안개 저편
그녀는 미소짓는다 그물을 들고 바다를 내려가는
사나이들의 낮은 휘파람이
들리다 그치는데

아득히 열리는 바다 달빛에 씻긴 물결이
그녀 잠 속으로 밀려들어 물보라를 일으킨다
자욱히 어둠의 가루를 흩날리며 파도가
해변에 토해놓는 부서진 나무 조각들

말미잘 불가사리 물거품의 상형문자들

다시 바람이 일어 잎사귀 흔들고
그녀 숨소리가 차츰 멀어진다. 서서히 구름의
천막이 걷혀진 밝아오는 하늘 저 멀리엔 차갑게
빛나는 등대 하나뿐


거리 저편 울려 퍼지는 불자동차 소리

 

내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은 없다

모자를 깊숙이 내려 쓰고 코트 깃을 올린 채

온갖 범죄와 유혹이 들끓는 거리를 초연히 지나간다

마약에 절은 사내가 칼에 찔려 내 발밑에 쓰러지고

부유한 미망인이 은밀한 미소를 건네오는 밤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안락의자에 기대어 가장 편안한 자세로

불현듯 찾아올 죽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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