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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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림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1. 27. 21:38

1968년 승려가 된 이후 줄곧 전국 선원에서 운수납자로 수행하다가

 6월항쟁을 기점으로 재야 시민활동을 해왔다
《유심》 2002년 봄호에 신경림 등의 추천으로 문단 등단
현재 보광사에 정진중
시집 <흔들리는 나무>

 

*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 효림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 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 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 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 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너희들도 산중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못난 사람, 재주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을 지키는 주인이 되고...
부디 초발심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 니다이에게 - 효림
 
니다이!
염려하지 말아라
나의 法은 맑은 물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능히 씻어 내리니
어찌 너인들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니다이!
너의 신분은 수다라
너의 직업은 똥을 푸는 사람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
자 망설이지 말고
내 손을 잡아라
나와 같이 강가로 가자
강물로는 네 몸의 똥물을 씻고
내 법으로 너의 업보를 씻어 주마
그리고 너와 나는 같은 길을 가는 벗이 되자
 
* 개망초 - 효림
 
어찌, 어찌 살아지다 보니 벌써 인생 반백 년
산에 들어 산 지도 수십 년
이제 바라는 것은 없다
마당에 내려 잡초라도 뽑아 볼까
흐트러진 돌이라도 반듯하게 놓아 볼까
보는 이 없는 마당을 다듬어 무엇하나
향기 나는 꽃도 없고
모양새 좋은 나무도 없는 내 마당
자연 그대로 놔두자
그냥 두어도 저절로
민들레 개망초…… 꽃들은 피어나고
시간은 마냥 빠르게만 흘러가더라
아무 바람도 없는 나는
마냥 즐겁기만 하다.

 
* 무소유 - 효림

 
아무도 그 소유권을 다투지 않는 저 찬란한 새벽별
지상에서는 단 한 뼘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나는
하늘을 우러러 저 샛별이나 가져야 하겠다.
 
* 깨어나라 - 효림
 
너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본 일이 있었느냐?
너희가 진정 나라의 주인이 되어 본 일이 있느냐?
깨어나라
굴종과 질곡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더럽고 치사한 종노릇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당당하게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정정당당하게 나오너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하겠다
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바람을 일으켜야 하겠다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시대 우리가 주인이 되는 바람이 분다
낡은 것은 가라
바람에 휩쓸려 가라
그리고 새로운 것이여 오라

 

* 등(登)백두산 - 효림
 
우리 모두 되려면은 백두산이 되자
천지연을 품에 안은 호연한 기상
그런 백두산이 되어
백두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자
남녘 북녘 편을 가르고
진하게도 싸웠다.
고달픈 역사 속에 어지간히 찌들었다.
사람이 옹졸해졌다.
치사해졌다.
동포야!
우리는 본래 백두산이 아니더냐
그렇게도 높은 기상
이제 그만 백두산의 마음으로 돌아가자
 
* 위령사(慰靈詞)* - 효림

 
사나운 바람은 먹구름을 몰고 와
사정없이 비를 내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무란 나무들은 가지를 있는 대로 흔들어 젖히고
무서운 공포
머리끝이 서고
닭살이 돋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오! … 오! … 오!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어찌 저리도 많으냐
억울하게 죽은 원귀들
집단 강간을 당한 죽음
총검에 찔려 창자를 다 쏟아낸 죽음
총알에 온 몸이 벌집같이 된 죽음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처참한 죽음들
저 비명횡사한 원귀들이 소리친다.
오! ……! 저 원귀들이
피멍든 한을 풀어 달라고
그대 가슴팍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고 소리친다
 
- 위령사(慰靈詞): 신효순·심미선 양과 8·15 이후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하여 짓는다. 효순과 미선은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죽은 소녀들이다. 이 둘은 학교를 갔다 오다가 훈련 중인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죽었는데, 미군은 이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아 시민 단체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 아프가니스탄 남자의 독백 - 효림
 
사실 나는 할 수만 있었다면
마을에 떨어진 스커드 미사일이 폭발하는 그때에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 날 밤, 하늘에 있는 별이란 별은 다 쏟아져 내리는 것같이
허공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폭탄이 쏟아져 내리고
그 폭발 소리에 내 어린 아들은
귀와 콧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고
내 아비와 어미 그리고 아내와 친구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사지가 다 찢겨진 채로
그 날 죽었어야 할 나는
귀가 먹어 더 이상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진 목숨
나는 원수들이 쏟아 놓고 간
그 폭탄의 파편을 주어
주린 배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대춘부(待春符) - 효림
 
공짜로 오는 봄이 어데 있으랴.
아직도 우리는
역사 앞에 갚아야 할 빚이 많은데
쓸개빠진 놈들은
상춘가(賞春歌)를 부르고
뜰에는
모란이 피는구나

 

* 오직 통일을 향하여 - 효림
―2001년 8월 15일 평양에서
 
먼길을 돌아
민족의 염원을 담아
달랑 배낭 하나를 매고
우리들 여기 평양 땅을 밟았다.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드디어 남북 정상의 6·15선언
그 멀고 먼 길을 돌아
오늘 우리들 이렇게 만났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
같은 땅에서
살을 섞고 피를 나누며
같은 역사를 만들며 수천 년을 살아왔네
오늘 우리들 이렇게 만나
얼싸안고 춤을 추는 뜨거운 감동
어찌 빙벽(氷壁)인들 녹이지 못하랴
민족은 무이(無二)요
조국은 불이(不二)라
강성국가(强性國家) 자주통일은 이제 너와 나의 같은 꿈이네
이제 앞만 보고 가야 하리
누가 무어라 해도 그저 앞만 보고 가야 하리
오직 통일을 향하여

 

* 열망 - 효림
 
죽어져서
땅속 깊이 묻혀져서
한 점 빛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는
적막한 그곳에서조차
나는 오직 살아서 못 이룬 조국의 통일을 바랄 것이요.
그 날
그 해 여름 어느 날에
우리 국토를 그만 쪼개 놓고
총을 마주 겨누라 하고
서로 원수가 되라 한 후에
자주, 자주 너무나 어리석게도
피 흘리며 원결(怨結)만을 쌓아 가는 가련한 조국이여
내 죽어 땅속에서
육신이 삭아 백토가 된다 해도
오직 통일을 열망하는 이 신열이 어찌 풀리리요.
 
* 아직도 기다리는 님 - 효림
-만해 화상의 떠나가신 님을 기다리며
 
그 날 그때 단풍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을 헤치고 떠나가신 님을 기다립니다.
돌부리를 흔들며 물은 쉬임 없이 흐르는데
한 송이 꽃이라도 들고
매운 향내나는 한 송이 꽃이라도 들고
하늘을 열어 주실 님을 아직도 기다리렵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저 이 몸은 한 덩어리 선돌이나 되어
님이 돌아오실 그 길 언저리의 선돌이나 되어
비바람이 섞어 치고 맑은 계곡이 탁류로 넘쳐날 때에도
기다리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도 선돌이 된 몸이매
썩지는 아니할 것이매
그냥 그 모습으로 기다리렵니다.
어디서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라도 불어와 먹구름을 거두고 푸른 하늘이 열릴 때에
그때 찬란한 빛으로 오실 님을 기다리렵니다. 
 
분열은 좋은 분열이다 / 박찬일
― 효림의 시세계 ― 


 효림 시집, 《흔들리는 나무》(책만드는집, 2003)
 
1. 들어가며


효림의 시 세계를 하나의 코드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서로 대립하고, 서로 길항(혹은 변증)하기 때문이다. 때로 모순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선 눈에 띄는 대립은 유익을 구하는 삶과 무익을 구하는 삶의 대립이며, 한마디로 ‘무익의 삶’의 추구이며,1) 우선 눈에 띄는 길항은 속(俗)의 세계와 성(聖)의 세계의 길항이며(俗과 聖은 상승의 이미지와 하강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우선 눈에 띄는 모순은 자기구원과 사회구원의 모순이다. 혹은 자기구원과 사회구원의 병존이다. 개별 항목들 또한 대립쌍·길항쌍·모순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쌍’을 빠져나와 다른 항목들과 자유롭게 연맹, 의미를 증폭시킨다.2)1) 다르게 말하면 인간 효림과 수행자 효림의 대립이다. 한마디로 ‘무욕의 삶의 추구’이다. 2) 예를 들어 ‘무익을 구하는 삶’(혹은 ‘수행자 효림의 삶’)은 하강의 이미지와 관계 있고, 무익을 구하는 삶과 하강의 이미지는 자기구원과 관계 있다. 유익을 구하는 삶은 사회구원과 관계 있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이론에 의하면 대립·길항·모순의 항목들은 상호 보완하여 전체를 설명한다. 바흐찐의 대화론에 의하면 ‘언어적 다양성’은 서로 얽히고 설켜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벤야민의 알레고리론에 의하면 각각의 별은 무의미하나 모여 있는 별은 유의미하다. 모여 있는 별은 북두칠성들이다
여러 항목들의 세계를 ‘분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분열’은 치열한 삶의 반증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때문이다. 삶이 운동이고 죽음이 정지라면, 분열·치열·방황은 ‘삶’의 목록들이고, 초월·화해·관조는 ‘죽음’의 목록들이다. 이 점에서 효림의 시집 《흔들리는 나무》의 표제시 〈흔들리는 나무〉를 분열·치열·방황의 나무로 볼 수 있다.
나무가 흔들린다
크고 우람한 나무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린다
조용한 날은
조용하게
더욱 깊이 흔들린다

 

― 〈흔들리는 나무〉 부분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시인이다. “조용한 날은”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시인이다. 항상 흔들리는 시인이다. 흔들리는 시인은 방황하는 시인이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므로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인이다.
“바람이 불면” 옆으로 “흔들”리고, 조용할 때는 “깊이” 흔들리므로, 수평으로 흔들리고 수직으로 흔들리는 시인이다. 수직과 수평은 동서남북을 형성하므로 동서남북의 삶을 사는 시인이다(혹은 십자가의 삶을 사는 시인이다). 동서남북의 삶을 사는 시인도 전방위적 삶을 사는 시인이므로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인이다.
비록 그가 시 〈한 그루 나무올시다〉에서 “나는 본시 어느 깊은 산 나무”라고 했어도 지금은 ‘깊은 산 나무’가 아닌 것이다.


내 나이테 하나하나에는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바람을 담고
햇빛이 빛나는 날에는
햇빛을 담고
구름이 흘러가면 또 구름을 담았습니다.
달을 담고 별을 담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하룻날
벌목꾼이 나타나 우람하게 자란 나를 사정없이 잘랐습니다.
아주 능숙한 솜씨를 가진 그는
내 몸통을 여러 개로 토막을 내고 말았습니다.
더러 잔가지는 그 자리에 남은 채 썩어 거름이 되고
더러는 어느 집 아궁이의 화목이 되고
몇몇 큰 둥치는 어느 집 기둥이 되고
또 더러는 책상도 되고 장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몸에 열두 줄 현을 달고
아름다운 악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픈 인생의 여인에게로 팔려와
온갖 애달픈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본시 어느 깊은 산 나무였습니다.


― 〈한 그루 나무올시다〉 부분


“거름”, “화목”, “기둥”, “책상”, “장롱”, “악기”의 삶을 사는 시인인 것이다. 쓸데가 많은 삶을 ‘분열된 삶’이라고 한다면 분열은 좋은 분열이다.
이 글이 텍스트로 삼은 것은 시집 《흔들리는 나무》의 시들과 그 이후에 쓰여진 시들 〈달빛 아래서〉, 〈겨울비〉, 〈노을〉, 〈덕장〉, 〈겨울강〉, 〈북〉, 〈투신자살〉, 〈설백 월백〉 등이다.


2. 무익을 구하는 삶: 무익의 노동


① 젖은 나무를 얼마나 비비면 불이 일어날까
날마다 젖은 나무를 오늘도 비비고 있다.
― 〈간화선〉 전문


② 아무도 그 소유권을 다투지 않는
저 찬란한 새벽별
[……]
하늘을 바라보며 샛별이나 헤어야겠다.


― 〈무소유〉 부분


두 편 다 ‘무익을 구하는 삶, 무익의 노동’을 보여주고 있다.


① 누가 “날마다” “젖은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는가. 첫째, ‘젖은 나무’가 문제이고, 둘째 ‘비벼 불을 피우는 것’이 문제이다. 젖은 나무에서 불이 일어날 리 없고, 그리고 원시시대에 비벼서 불을 피웠기 때문이다. 두 개의 항목 다 현실의 논리를 벗어나 있다. 무익의 노동, 무익을 구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의 논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선시 영역에 속한다. 시집 《흔들리는 나무》의 〈서시(序詩)〉이다.


② “샛별”을 센다고 샛별이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샛별을 세겠다고 하고 있다. 무익을 구하는 삶, 무익의 노동의 절정이다.
무익을 구하는 삶, 무익의 노동은 유익을 구하는 삶, 유익의 노동에 반대하는 것이다. 즉 목적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투입이 있어야 산출이 있다는 인과론적 세계인식에 반대하는 것이다.
비가 내려 밤은 더욱 적막한데
바람조차 세차게 불어
우 우 숲이 소리치며 울고
미리 준비된 나침반도 없이
돛도 없는 한 척의 배를 띄운다.
하지만
꼭 가야할 항구도 없다.
창밖을 내다보면 그저 먹빛일 뿐
따지고 보면 모든 이의 인생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것이다.


― 〈비오는 밤 산중 우거에서〉 전문


“나침반도 없이/돛도 없”이 “배를 띄운”다는 것이 목적합리주의에 대한 반대이고 인과론적 세계인식에 대한 반대이다. 원인을 만들지 않으니 결과도 없다고 해야 할까. 시인은 “꼭 가야할 항구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인의 비극적 세계인식의 일단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의 인생은/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렇다. 인생은 원래 나침반도 없이 돛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다.
무익을 구하는 삶의 정수를 또한 〈운수객(雲水客)〉이 보여주고 있다.
석장(錫杖)이나 하나 짚고서
머리털과 수염은 자라는 대로 두고
눈이사 먼 하늘을 담아
수목 우거져 새 우는 곳이면
내 어디든지 가리
가다-가다
머리털이 희어지고 내 힘 다하면
양지바른 두렁 밑이라도 앉아
내 마지막 종을 울려야지


― 〈운수객(雲水客)〉 전문


탈현실, 혹은 탈속의 자세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도 적용되고 있다. 시의 전반부가 삶에 적용되고 있고, 시의 후반부가 죽음에 적용되고 있다. 죽음에 적용되었다는 것은 “양지바른 두렁 밑”이 임종의 자리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종”을 염두에 두고 사는 자는 초극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무욕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무욕의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 효림’을 극복하려는 ‘수행자 효림’의 삶이다.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손사래를 치며
엎어지고 넘어지며 달아나지만
검은 그림자는 끈질기게 따라오고
잡힐 듯 잡힐 듯
아무리 용을 쓰며 달려도
오금이 펴지지 않아
어릴 적 꿈속에서처럼
오늘도 탐욕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다


― 〈꿈속에서〉 전문


“탐욕의 그림자에 쫓기”는 인간 효림과 ‘탐욕의 그림자’보고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 수행자 효림이 대립하고 있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탐욕의” “검은 그림자”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면 이드의 형상이고, 효림의 “따라오지 마라”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면 에고의 말이다.3)3)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죽음의’ 검은 그림자로 시작해서 ‘탐욕의’ 검은 그림자로 끝난 것이다. 영향미학적으로 볼 때 첫째 연의 검은 그림자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이다.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용을 쓰며” 도망치나 결국은 “오금이 펴지지 않아” 잡히기 때문이다. 셋째 연에서 검은 그림자를 ‘탐욕의’ 검은 그림자로 한 것은 ‘낯설게 하기’의 시도이다. ‘탐욕의 검은 그림자’라는 새로운 언어가 생산(창조)되었다.

‘수행자 효림의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원융(圓融)의 세계, 곧 색(色)이 공(空)이 되고 공(空)이 색(色)이 되는 세계이다. 불이(不二)의 세계이다.
뼈가 녹아내리는
뼈마디가 다 녹아내리는
처절한 고독이 있고서야
새로운 사람 하나 태어나더라.


― 〈고독〉 부분


“녹아내”린 곳은 다름 아닌 원융의 세계이다. 절대 “고독”의 수업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은 신약 〈에베소서〉 4장과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새로운 인간”과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에 있다.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은 자이다.
원융의 세계는 “무산 화상께”라는 부제가 달린 〈헌시〉에서도 볼 수 있다. “큰 바윗돌”이 원융의 세계이다.
큰 바윗돌이 매운 향내를 뿜어낸다면
그것은 또 어떤 냄새일까
억만년 오랜 세월
뜨거운 햇볕 아래
속으로, 속으로 향내를 구워내어


― 〈헌시〉 부분


“억만년”을 “뜨거운 햇볕 아래” “구워내어”야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취하고/그대는 나에게 취하”(〈그대에게 취하여〉)는 세계도 원융의 세계, 불이의 세계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어디 있는가. 새로운 연(緣)으로 너와 내가 뒤바뀌면 너는 네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니다.


3. 속(俗)과 성(聖)의 길항: 상승과 하강의 시학
인간 효림과 수행자 효림의 대립은 속(俗)과 성(聖)의 길항으로 첨예화된다. 속과 성의 길항은 상승의 시학과 하강의 시학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① 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내 명치끝을 치고 솟아오르는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 〈잠 못 드는 밤〉 부분


② 물보다 더 몸을 낮추기만 한다면
땅보다 더 낮게 흐르는 물보다
제 몸을 낮게만 한다면


― 〈하심 3〉 부분


①은 상승의 시학에 포섭되고 ②는 하강의 시학에 포섭된다. “밑바닥”에서 “치고 솟아오르는” 것이 상승이고 “땅보다” “물보다” “몸을” 더 “낮”추려는 것이 하강이다. 물론 ‘치고 솟아오르는 것’이 욕망이므로 속이고, ‘몸을 낮추려는 것’이 욕망의 억제이므로 성이다. 속과 성이 길항하는 모습이다.
상승과 하강의 변증에서 주목되는 시는 무엇보다도 〈황진이와 총각〉이다.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1절, 2절을 보자.


1
아주 붉게 잘 달구어진 쇠꼬챙이같은
뜨거운 열병이 이 쌍놈의 명치끝을 치고 오릅니다.
아씨!
호두알 속보다 더 깊이 감춰두고 있는
내 사랑 아씨!
밤마다 꿈에만 찾아오시는 아씨!
제발 저를 살려주셔요.
이 몹쓸 열병은
내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한답니다.
남이 알게는 못하고
그저 남몰래 저를 찾아와 주셔요.
제발 아씨의 그 섬섬옥수
고운 손길에 마음을 담아
내 명치끝을 아래로, 아래로
쓸어내려 주셔요.


2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도록
기다려도 기다려도
사랑은 오시지 않고
아씨!
곱디 고운 내 사랑 아씨
안녕히 계셔요.
이 몸은 저승으로 떠나갑니다.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고
한을 안은 채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길로
떠나갑니다.


1절의 첫 두 행이 정(正)이다. “뜨거운 열병”4)을 앓고 있다. 뜨거운 열은 위로 “치고 오”른다. 상승의 이미지이다. 1절의 나머지가 반(反)이다. 무엇보다도 끝의 두 행이 그렇다. “내 명치끝을 아래로, 아래로/쓸어내려 주셔요”라고 간구하고 있다. 뜨거운 열병을 가라앉혀 달라고 “아씨”(초월적인 힘)에게 간구하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라고 했으므로 하강의 이미지이다. 요컨대 ‘상승’의 정이고 ‘하강’의 반이다. 4) “뜨거운 열병”은 〈화가 장승업〉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광기”로 전이된다.

 

2절이 합(合)이다. “기다리고/기다려도”5) 하강의 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승의 정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저승”의 길을 택한다. 저승에는 상승도 하강도 없다. 저승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무이(無二)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6)5) 2절의 첫 두행 ‘기다리고/기다려도’는 원래 한 음보(音步)이다. 한 음보를 두 행으로 처리하여 기다림의 정도를 강조하였다. 6) “사르르 미끄러져 가는 배같이 […] 가고는 다시/돌아오지 말아야 할 일이다 […] 잊어버릴 일이다”(〈떠나는 배같이〉)라고 읊는 것도 합(合)명제에 부합한다.


주목되는 표현이 많다. “아주 붉게 잘 달구어진 쇠꼬챙이”는 남성성을 상징한다. “치고 오”른다고 했으므로 남성성은 상승의 이미지를 갖는다. “아씨의” “섬섬옥수”는 여성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성은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다. 섬섬옥수를 “아래로, 아래로/쓸어내려 주셔요”라고 했다. 물론 여기에서의 여성성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여성성이 아니다. ‘아씨’는 초월적인 힘에 대한 상징이다.
시 전반에 정(正)의 이미지가 압도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상승의 이미지가 ‘반(反)’에도, ‘합(合)’에도 있다. 반(反)에서 “이 몹쓸 열병”이라고 하고 있다. 몹쓸 열병이 “내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고 하고 있다. 합(合)에서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도록”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열병으로 다 녹아내린다고 한 것이다.
3절, 4절이 다시 반이다. 1, 2절이 “총각”의 관점이고, 3, 4절이 “황진이”의 관점이다. 황진이의 관점 3, 4절은 다시 1절과 만난다. 3절에서


간밤에 바람이 그리도 많이 불어와
내 방문을 흔들어놓더이다.
총각님
부끄럼 많은 총각님
왜? 그리 가셨어요.
깊은 산속 숨어서 피는 꽃같이
아리따운 사랑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왜 그리 가셨어요.
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마음은 뜨거운 열병을 앓는 총각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바람” “꽃”들 역시 상승의 이미지를 갖기 때문이다. 4절은 3절을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친 데도
이따위 세상 나는 싫어요.
어머니 아버지 저를 말리지 마셔요.
나는 차라리
허리에 사향을 차고
이른 봄날은 그냥 보내고
늦은 봄날
이 꽃 저 꽃을 찾아다니는
곱디고운 나비같은 기생이 될래요.


“벼락”(하강)을 물리치고 “이 꽃 저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가 “기생이” 되겠다고 하고 있다. 나비는 가벼움이므로 상승을 표상한다.7)7) 이홍섭은 〈황진이와 총각〉을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계승하는 “자유와 생명”의 시로 보고 있다. 이홍섭,〈사무침의 시학〉, 효림 지음, 《흔들리는 나무》, 책만드는집, 2003, 144면 참조.


그리움도 상승의 이미지이다.
씻어도
씻어도
물로는 씻어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네.
태워도
태워도
불로는 태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네.


― 〈그리움〉 부분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그리움”,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그리움”은 계속 생기는 그리움이므로 상승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시편들은 이외에도 많다.


① 지워지지 않는 나의 사랑
아직도 따스한 그 온기 남았어라


― 〈세월이 지나도〉 부분


② 바보같이 그저 바보만 같이
반 발자국 반 발자국 뒤에만 서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리워 그리워만 하는구나
꽃같이 꽃만 같이 아름답게 아름답게
뒤에서 뒤에서 따라만 가는구나


― 〈그림자〉 부분


②를 ‘상승의 이미지’의 시라고 한 것은 “꽃같이 꽃만 같이” “따라”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효림의 시에서 꽃이 상승의 이미지인 것은 하강의 이미지로서 ‘낙화’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으로 떨어져/이 사람 저 사람의/발길에 짓밟혀/그 곱던 빛깔도 사라지고/그 고상한 향기도 없어”(〈낙화〉)진 것이 “낙화”이기 때문이다.


4. 자기구원과 사회구원
또 하나의 관점은 자기구원과 사회구원의 모순(혹은 병존)이다. 소승과 대승의 모순(혹은 병존)이다. 앞에서 인간 효림과 수행자 효림이 대립한다고 했을 때 ‘수행자 효림의 시’를 ‘자기구원의 시’라고 할 수 있다.8)8) ‘수행자 효림의 시’에서 주목되었던 것이 원융(圓融)의 세계, 불이(不二)의 세계였다. 본고 2장 ‘무익을 구하는 삶: 무익의 노동’ 참조.
자기구원의 시를 환기해보자.
무릎을 곧추고
다시 무릎을 곧추세우고
두 손을 모아
부처님 전에 사뢰나이다.
얼음장같기만 한 이 내 업장(業障)이
아무 공덕 없이 사라지겠나이까.
아무쪼록 부끄럽게도
모래알 하나만 같고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같은
아!…… 작은 이것
부처님 전에 받들어올려
큰 바다의 공덕을 바라나이다.


― 〈공양〉 전문


“공덕”을 쌓고(“무릎을 곧추고/다시 무릎을 곧추세우”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바라”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혹은 자기구원에 이르기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은 기독교의 ‘낙타의 비유’가 상징하는 공덕을 상기시킨다. 불교에서는 공덕을 쌓으면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기독교에서는 공덕을 쌓으면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사바세계의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적 세계관과 다른 것은―불교에서는―공덕을 쌓아야만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정(定)한’ 해탈의 길을 두지 않은 것이다.


시집 《흔들리는 나무》 3부에 있는 시편들이 주로 사회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구원의 시들은 크게 나누어 반전·반미, 민족통일, 평등사상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현실구원, 혹은 사회구원을 내용으로 하는 시편들은 다른 말로 하면 사회참여의 시들이다. ‘사회참여’의 출발점은 연민이다. ‘연민’이 반전·반미, 민족통일, 통일사상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9) 9) 물론 연민만으로는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사회체계 및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연민의 압권은 〈한강 가에서〉에서 “별들이” “비쩍 말라 불쌍하게만 보”인다고 한 대목이다. “없”어진 별들을 보고 “아이고! 불쌍한 내별들!”이라고 탄식한 대목이다. 별을 연민하는 자는 ‘다’ 연민하는 자이다. ‘효림은 연민의 효림이다.’10)10) 〈투신자살〉 또한 연민의 시로서 강렬한 사회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반미·반전의 시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절규〉, 〈아프가니스탄 남자의 독백〉 등이 있다. 또 8·15 이후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우리 영령들을 위한 〈위령사(慰靈詞)〉가 있다.


① 자라면서 뼛속 깊이 새긴 말은
미국은 우리의 원수니라
사내가 원수를 죽이고 죽는 것은
가장 빛나는 영광이니라.
― 〈소년의 절규〉 부분


② 집단 강간을 당한 죽음
총검에 찔려 창자를 다 쏟아낸 죽음
총알에 온몸이 벌집같이 된 죽음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처참한 죽음들
저 비명횡사한 원귀들이 소리친다.
오!…… 오!…… 저 원귀들이
피멍 든 한을 풀어달라고
그대 가슴팍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고 소리친다.
― 〈위령사(慰靈詞)〉 부분


③ 손으로 못 깨는 벽은 몸을 던져 깨자
살이 터지고
뼈가 어스러져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말 벽
이 생이 다하고 다음 생에도
물러서지 말고 이 짓을 되풀이하자
― 〈맨손으로〉 부분


④ 내 것은 네 것처럼
네 것은 내 것처럼
그렇게 몽땅 나누어 갖자
― 〈맹세〉 부분


⑤ 이제는 혁명이다
모든 것을 갈아 엎어버리자
그리고 너와 나
우리의 땅에 새 세상을 만들자
백성이 하늘이 되고
땅 위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을 진짜로 만들어보자


― 〈이제는 우리의 손으로 세상을 만들자〉 부분


①, ②가 반전·반미의 시, ③이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시, ④, ⑤가 평등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시이다.
이 시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참여의 시’답게 ‘격정’이 수사법(修辭法)의 대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였다. 단순한 구호에 빠질 수 있는 시들을 구제한 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그러나 죽지도 못한 목숨
나는 원수들이 쏟아놓고 간
그 폭탄의 파편을 주워
주린 배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아프가니스탄 남자의 독백〉 부분


앞에서 미군의 “스커트미사일”이 “어린 아들” “아비와 어미 그리고 아내와 친구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 스커트미사일의 “파편을 주워”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는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목숨은 얼마나 질긴 목숨인가. 목숨은 얼마나 소중한 목숨인가. 스커트미사일은 소중한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많이’ 죽였는가. ‘질긴 목숨’(혹은 ‘소중한 목숨’)의 제시가 반전·반미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다.
5. 나가며
효림은 사회주의자인가. 위의 ④, ⑤의 시편들을 보면 효림은 사회주의자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시편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헤르베크(G. Herwegh)는 1863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노동하는 남자여, 확 깨어나라!
그리고 그대의 힘을 알아라!
그대의 힘센 팔이 원한다면
모든 수레바퀴는 정지한다.


― 〈전독일 노동자 동맹 연합가〉 부분


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은 유익을 구하는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물론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무익을 구하는 삶’과 모순된다.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만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인간 효림과 수행자 효림의 대립, 속(俗)과 성(聖)의 길항(혹은 상승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의 변증), 소승 세계와 대승 세계의 병존 등이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의 스펙트럼이 넓게 펼쳐져 있는 자는 자주 모순되는 태도를 취한다. 니체도 자주 모순되는 태도를 취했었다. 그들은 ‘현재’에 충실하면서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진리를 추구한다.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모순(혹은 분열)은 무엇보다도 치열한 삶을 사는 자의 조건이다. 치열한 삶을 사는 자만이 분열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괴테)


박찬일
시인·문학평론가

1956년 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에 〈무거움〉 〈갈릴레오〉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에서 수학

시집으로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시론집으로 《해석은 발명이다》 등  

 

출처, 엠파스블로그, 새벽날개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