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박찬일 시모음 본문
1956년 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에 〈무거움〉〈갈릴레오〉 등을 발표하며 등단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2년 제3회 박인환문학상수상 <나는 푸른 트력을 탔다> 외
시집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사랑, 혹은 에로티즘>
시론집으로 <해석은 발명이다>
편운 문학상 우수상
나는 남자다
나를 욕할 때는 남자 욕을 하고
밖을 욕할 때는 여자 욕을 한다
남자 욕 해보셨지요? 여자 욕 해보셨지요?
머리 감아 보셨지요? 설거지해 보셨지요?
나는 물에서 왔다. 뭍에서 살다가 자주 물로 간다
아파트 밖은 여자다
여자가 나를 사랑했고
여자가 나를 버렸다
해장술 석 잔에 하루를 망치고
여자 셋에 일생을 망쳤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느님
쳇쳇
여자 때문에 일생을 망쳤다
나를 욕할 때 남자 욕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망했으니까 망한 남자 욕을 한다
사실 여자 때문에 남자 욕을 하는 것이니까
욕은 전부 여자 욕이다
아파트는 시궁창이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시궁창 밖에 있는 여자를 본다
여자 욕을 한다
자작나무 껍질을 바쳤던 여자 생각 한다
나비를 보는 고통 1
혼자서 날아다니다가
흙에서, 흙에서 뒹굴다 죽는 나비여.
날개가 아니라 몸뚱어리라는 것을.
그가 날개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을.
내 진작 알았더라면
날개란 몸뚱어리에 붙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내 진작 알았더라면
뭄뚱어리가 죽으면
날개도 따라 접힌다는 것을.
내 진작 알았더라면
혼자 다니다가
흙에 뒹굴다, 흙에 뒹굴다 죽는 나비에
나비의 운명에
내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
누가 내 목을 돌렸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왼쪽으로 돌릴 때 오른쪽 힘을 주다가
오른쪽으로 돌릴 때 왼쪽으로 힘을 주다가
그만 목이 헐렁해져 버렸습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힘을 쓰지 않겠습니다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돌려주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돌리다가
목을 떨구겠습니다
사과나무의 불안
사과나무가 불안한 것은 사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꼭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안에는 요행이 없다. 불안은 이루어진다. 불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불안을 꿈꿀 때이다. 불안을 꿈꾸면 불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과나무의 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사과나무의 사과알들을 보라. 불안을 꿈꾸는 사과알들이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알들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안을 꿈꾸는 사과들은 아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안을 꿈꾸는 사과들은 더 빨리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지 불안을 꿈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남아있는 사과나무의 사과알들은 오로지 불안을 꿈꾼 사과알들이다. 떨어져주려고, 기꺼이 떨어져주려고 마음먹은 사과 알들이다. 불안에 쾌히 시달리자는 사과알들이다. 불안을 꿈꾸는 사과나무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한 연구
죽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4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7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사람들아 미안하다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그대들 전부를 잊기로 한다 나도 잊기로 한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오이 당근을 파느라 감자 고구마를 파느라 양파를 파느라 시금치 마늘을 파느라
푸른 트럭에서 나는 수박 참외를 파느라 토마토 사과 귤을 파느라 배를 파느라 계란을 파느라 정신이 없다.
이면수 꽁치를 파느라 조기를 파느라 고등어를 파느라 푸른 트럭에서
푸른 트럭을 파느라 푸른 트럭만 남기고 파느라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녹음기에 녹음하느라
녹음기를 켜놓느라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정신이 없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정신이 없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그대들 전부를 잊었다 나도 잊었다 푸른 트럭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푸른 트럭을 몰고 사라지려고 한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푸른 트럭에 있다
정신이 없다 나는 포도주를 마신다 푸른 트럭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야채를 팔아 과일을 팔아 계란을 팔아 생선을 팔아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만 마신다 정신이 없다
사람들아 미안하다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푸른 트럭에서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을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만 빼고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에서 마신다 붉은 포도주를 마신다 그와 함께 붉은 포도주를 마신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2003 박인환 문학상 수장작)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