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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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7. 13. 00:10

1970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현재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
2003년 『파라21』에 주치의 h」외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2005년 렌덤하우스중앙

 

너무 작은 처녀들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 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마음으로만 굿바이

 
 차창에 기대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었을 때 나는 네가 그 상태로 숨이 끊어져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바랐다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츠의 소녀여 땀에 젖은 속옷이 열기를 뿜어대는 밤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고 가슴 속 네 발 짐승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어 너를 어떻게 해야할까! 안녕 널 보내주고 싶은데 컹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봐, 신사양반 좀 점잖게 굴어! 그런데 가만, 이 미친 계집애가 오히려 내 목을 물어뜯을 셈이군 뻐근해, 싫어 이 기분

 

 차창에 기댄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이 슬프게 떨릴 때 나는 네가 그 슬픔 속에서 심장을 움켜쥔 채 고꾸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내 옷소매를 놓아줘 축축한 양말이 미끌거리는 밤 가슴 속엔 으르렁거리는 이빨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 긴 머리 원피스 녹색타이츠의 소녀여 너를 이렇게 두어도 될까!

 

 이 더러운 계집애 이 더러운 계집애, 가랑이 속에 냄새나는 털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 구역질 나, 싫어 이런 감정

 

  미안해 미안해, 말하고 싶지만 사나운 발톱이 네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버릴 것 같아 다가서고 싶지만 널 한입에 물어 죽일까 두려워
 너는 부드러운 손길 다정한 목소리 모두 나에게 주었지만 나는 너에게 줄 것 아무 것도 없고 너를 얌전히 보내주기도 싫어 뒤죽박죽의 머리칼이 불처럼 타오르는 밤 너를 이대로 보내도 좋을까!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츠의 소녀여,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굿바이

                       

 출처,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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