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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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2. 26. 10:02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8년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세계사

2002년 시집,『착란의 돌』 천년의시작

 

국어선생은 달팽이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 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 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 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 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의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 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 꼭대기로 날려보낸다.

 

글자들이 타고 다니는 기차

                                                    

밤은 두 눈이 파도치고 있었다

밤의 노란 링 귀고리가 살랑 흔들렸다

글자들이 힐끔힐끔 나를 읽고 있었다

글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봐 이 기차에 처음으로 사람이 탔어

도대체 어딜 가는 길일까?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예쁜 글자 하나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는 모두 조약돌로 되어 있었다

조약돌 구름과자

조약돌 기린과자

조약돌 토란과자

조약돌 포도를 꺼내 입에 넣자 입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슬픈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꼭 다문 입술 뒤의 어두운 울림통을 생각했다

포도 속에 뿌리 내린 빛과 음의 실뿌리들을 생각했다

 

취한 달이 지나갔다

얼굴에 깊고 쓰린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창 밖 세상으로 빈 술병을 휙 집어던졌다

낮에 먹은 상한 빛을 밤에 토하고 있었다

 

말했다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 기차에 탈옥한 글자들이 탔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사람을 보면 죽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거 참 잘 됐네요

내 뒷자리에서 홀쭉한 침묵이 말했다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허공으로 부드럽고 착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어항이 있었어요

어항은 아기의 발처럼 아주 아주 작았는데

잘 울고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젖을 물리고

햇빛을 듬뿍듬뿍 뿌려 주었더니

나팔꽃처럼 쑥쑥 자랐어요

 

어항은 조금 커져 어항 속에

연못을 하나 갖게 되었어요

어항은 점점 더 커져

포파 아저씨가 사는 마을과 숲

꽃밭과 초원과 과수원도 갖게 되었어요

포파 아저씨가 집에서 시를 쓰고

새들이 호수에서 낚시놀이를 하는 동안

어항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온세상을 갖게 되었어요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어요

어항은 늙어 어느새 수염이 하얗게 달렸어요

어항은 어항 속의 세상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어항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올빼미들의 멋진 기타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시절이 너무도 너무도 그리워

탁구공처럼 다시 작아졌어요

 

이제 아주 아주 작아진 어항 속에는

아주 아주 작아진 온세상이 들어있어요

온갖 동물 식물 별과 구름들이 모두모두 들어있어요

밤마다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래가 나와

바다 속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네가 기린을 상상하면 어항에선

기린이 목을 내밀고 웃고

비행기를 상상하면 비행기가 날아올라요

 

혼자 밤길을 가기가 무서울 땐

숟가락으로 어항을 탁탁 두드리며 상상해 보세요

그럼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착한 호랑이가 나와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 줄 거예요

그러나 조심해야 해요

어항은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이 몰래 훔쳐 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눈썹 밑의 그 반짝거리는 마술 어항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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