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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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12. 26. 00:37

1973년 부산 출생.
1998년 『시와사상』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2003년 천년의시작)

        < 거인> 2005년 렌덤하우스중앙  
         

키스

 

 나는 나라고 가끔씩 싱거운 생각을 한다. 너는 너라고 가끔씩 싱거운 맛을 본다. 내 생각이 어디 발라져 있나, 물어보면 손가락을 쭉 뻗어 내 입술을 가리킨다. 너는 너라고 맛은 네가 보고 내 입술은 달다 쓰다 말이 없다. 한없이 거추장스러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혀를 깨물고.

                                                                                               
자두나무 당신
 

당신과 내가 간편한 사이라서
헤어져도 좋은 간편한 사이라서
당신의 수첩에서 간편한 내 이름을 지우고
냉큼냉큼 잘도 받아먹은 씨앗들
당신의 씨앗들 모두 뱉아서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잘가, 하고 부르면
당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딱 한번 돌아보고
가서는 아니 오고
영영 아니 오는 당신에게
간편한 당신에게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자두나무가 되어
불알 주렁주렁 달린 자두나무가 되어
우리 사이에 너무 간편해서 좋은 우리 사이에
씨알 굵은 당신의 목소리를 토해서
게워내서
더러워 더러워
내가 다시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내가 아니라서
간편한 내가 아니라서 불편한 당신은
안개 자욱한 자두나무 숲이 되어
운다네 자두나무 자두나무
당신의 온 숲을 흔들어 운다네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깨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새의 윤곽

 

 아주 먼 곳에서 하늘은 있다.

 

 너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아주 먼 곳에서 공기는 빛나고 날은 흐리다. 맑은 날이면 구름이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너보다는 느린 속도로 하늘에 구멍을 내고 아주 먼 곳에서 흐린 날까지 걸어서 온다. 구름에는 비의 두 발이 언제라도 숨어 있다.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모이를 쪼듯 땅을 후벼파는 빗방울도 너와 함께 너의 이웃들. 잊어먹지 않고 다시 올라가는 너를 둘러싼 공기방울도 너처럼 배가 부르지는 않다.

 

 너를 말하기 위하여 너는 거기 있다.

 

 한동안 네가 있다는 것만 확인되는 까만 점 한 귀퉁이에서 문득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고 너는 그러고도 한참을 떠 있다. 바람 속인지 구름 속인지 너의 내부는 배부른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하늘 속,

 

 보이지 않는 구멍에서 온 하늘바닥으로 너는 날개를 친다. 너를 말하지 않는 곳에서 비는 내리고 누구보다 큰 발자국 소리로 너는 걸어서 온다. 아주 먼 곳에서

 

 또 한번 구름이 되는 것을 구경할 것이다

 

물구나무 당신

 

자두 속에 자두나무가 산다면
불알 주렁주렁 달린 자두나무가 숨어 산다면
물 속에는 물구나무 당신이 누워 산다
물구나무 당신이
똑바로 서서 산다
당신과 정반대인 당신이
주름 많은 당신이
당신과 똑같은 당신을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산다
바람 많은 당신이
씨알 굵은 당신을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그렇게
자두 속에 자두나무 당신이 산다면
내 물 속에는 물구나무 당신이 산다
불알 주렁주렁 달린 내 나무가 산다

 

거품인간

                             
  그는 괴롭게 서 있다. 그는 과장하면서 성장한다.  한나절의 공포가
그를 밀고할 것이다. 한나절이 아니라 한나절을 버틴 공포 때문에 그
는 잘게 부수어진다.  거품과 그의 친구들이 모두 다른 이름이다.  그
것은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공포 때문에.

  한 번에 일곱 가지 표정을  짓고 웃는다.  그의 눈과 입과 항문과 성
기가 모조리 분비물에 시달린다. 한 명이라도 더 흘러 나오려고 발버
둥을 치는 것이다. 정오에.

  가장 두려운 한낮에 소란을 베껴가며 폭죽은 터진다.  밤하늘의 섬
광이 여기서는 외롭다.  표면까지 왔다가 그대로 튕겨나가는 소음들. 
밖에서는 시끄럽고 안에서도 잠잠한 소란을 또 한 사람이 듣고 있다.
그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그는 괴롭게 서 있다.

  공기가 그를 껴안을 것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떨어진 사람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을 알고 있다
        죽지 않을 만큼 땅이 파이고 피가 고이고
        땅바닥은 뚜렷이 그의 얼굴을 알아본다
        죽지 않을 만큼 사람들은 놀라고
        괴로워하고 실컷 잊을 테지만,
        지상에서 지하로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그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가 떨어진 자리로부터 땅바닥을 치고
        달아난 소문이 끝날 즈음 어디선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그보다 더
        무거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떨어졌다
        때가 되면 쏟아지는 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한가 싶은 땅바닥엔 그가 남기고 간
        얼룩과 행인들의 발냄새 간간이 보도블록을 비집고
        솟은 엷은 풀냄새에 섞여 그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다
        올려다보면 무심히 발 씻는 소리 내려와 쌓인다
        그는 떨어지고 있다

  

드라마

 

 너는 어제 헤어졌고 두어 번 화해할 기회를 놓쳤고 싸운 이유는 잘 모르겠다. 너는 어제 헤어졌고 헤어진 이유는 그저께나 그그저께의 일이고 나는 그 시간에 프로야구를 보고 있었다. 두 번 붙어서 두 번 다 패한 그 경기를 어제아침 너의 결별 소식과 함께 들었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 잘 들어맞는 너희 두 사람과 이틀 동안의 갑작스런 패배를 수긍하지 못하는 팬들의 반응을. 그것은 중요한 경기였고 하필이면 라이벌끼리 만난 그 경기에서 맥없이 헤어진 이유를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 또한 그들에게는 중요한 경기였다. 너 또한 아파서 유학간 걸로 되어있고 지금보다 더 성공했기 때문에 죽은 걸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떠나는 날짜만 남았고 혹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서 갑작스런 이 연패를 끊어줄 날을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른다. 너의 열렬한 상처뿐인 혼자 남겨지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감독은 아마 새로운 일정을 짤 것이다. 몇 년 만에 불쑥 찾아온 우승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너는 어제 헤어졌고 두어 번 화해할 기회를 놓쳤고 중도에 하차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너도 모른다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고가도로 아래

                      
  오래 길을 걷다 보면 머리 위에도 길이 보일 때가 있다. 몇 년을 하루같이 걸어와서 올려다보던 길, 한동안 찾지 않은 이 길을 두고 사람들이 고가도로라고 부르는 그 아래에 내가 있을 확률이 높다. 

 

  다르게는 산업도로라고 부르는 이 길을 따라 트럭들이 흘리고 가는 먼지알갱이가 내려앉는 그 아래에 서서 내가 있을 확률이 높다. 자욱한 먼지와 희박한 공기가 만나서 먼저 가는 사람의 재채기를 받아주는 은행나무 옆에 내가 서 있을 확률이 높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정을 주고받고 타액을 주고받고 마지막에는 이별을 주고받는 무심한 거리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곳, 새끼 같은 먼지가 태어나는 곳 한가운데 내가 서서 울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지상의 길과 하늘의 길이 어긋나는 곳에서 우리가 헤어지며 하는 말 가운데 가장 추악한 기억만 걸러서 듣는 나무, 은행나무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서 있는 이 길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지금도 아름다운 때가 묻어나는 한 사람의 집이 있을 확률이 높다. 돌아가서는 까맣게 묻은 사랑을 두고두고 꺼내먹던 한 사람의 얼굴을 유난히 흰 이빨로만 기억하는 내가 여기 서서 기대어 있을 확률이 높다. 

 

  머리 위에도 길이 다니고 지상에서도 너무 멀리 뻗어가버린 그 길가에 서서 은행나무 한 그루, 흰 발목을 드러내며 웃고 있을 확률이 높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온 그 길을 따라 밑동부터 잘려나간 나무들이 잊지 않고 서 있을 확률이 높다.


시집, 거인(랜덤하우스중앙)

 

몰라도 되는 것들

 

내가 이때까지 신주처럼 모셔왔던 것들

도대체 모순이 없는 것들

내 안에서 가장 완벽한 것들

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

죽어서도 놓기 싫은 것들

놓쳤는데 자꾸 따라오는 것들

것들 것들 건들거리며

도대체 앞 뒤가 안맞는 것들

끝까지 모순이 없는 것들

속에 알을 싸질러놓는 것들

내 안에서 내가 아닌 것들

그만 죽어도 좋은 것들

죽어서도 내가 아픈 것들

후회하고 다시 보는 것들

이라고 일러주는 것들

일러줘도 내가 모르는 것들

몰라서 더 모르는 것들

몰라도 되는 것들

 

그가 토토였던 사람
 

나는 어지럽고 착한 사람

돌아보면 고귀하고 거룩하고

헛된 죽음이 따라붙는 거리

그 거리에서도 조용하고

말이 많았던 사람, 그러다가

아이는 어른이 되는 사람

가끔은 꽃이 핀다,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은 사람

그때는 이미 황혼이었던 사람

절망하더라도 이빨은 닦고 자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쯤

눈이 오는 사람

눈이 오는 기차를 타고

가끔은 영안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뒤척이는 사람과 멀미하는 사람들 틈에

내가 서 있는 사람, 이를테면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지하가 날 일으켜 세웠구나

싶은 사람, 돌아보면

재빠르고 느린 발이 쫓아오는 사람

유유히, 불안하게, 절뚝이며

고백하던 그때를 걸어서 오는 사람

그때가 언제냐고 묻는 말에 방금 전까지

모든 길을 되돌려주는 사람, 말하자면

그가 토토였던 사람

언제나 조용하고 말이 많았던,


내일은 

 
 내일은 계절의 여왕 오월에 걸맞게 전국에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기가 막힌 날씨에 들떠서 줄줄이 교외로 빠져나가고 시내는 텅 비었다 내일은 프로야구장마다 관중들이 꽉꽉 들어찼고 다저스의 찬호는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260경기 연속안타행진을 계속하였다 내일은 무하마드 알리가 은퇴한 지 30년만에 헤비급 챔프의 자리에 올랐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떨어라 아니 털어버리라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일은 다시 돌아와 유언을 번복하시고 나는 다시는 제사 같은 건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은 보이지도 않는 먼 별이 그보다 더 먼 별에게 두드려 맞는 것이 보였고 가슴 깊이 멍이 든 어머니는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나와 동거에 들어갔다 내일은 벌써 5개월 된 그녀가 지겹다고 투덜거렸고 나는 우리 사이 그만 이쯤에서 지우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뱃속의 아기가 버럭 고함을 질렀고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만삭의 배를 이끌고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내일은 태초의 거룩한 말씀이 하수구를 통해서 올라왔고 사람들은 온종일 썩은 냄새에 코를 막고 지나갔다


밤에 오는 사람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잠깐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밤을 새워 산책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눈썹 밑으로는 전부가 그늘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내 손을 잡고 가는지 잠깐 옆에 있는 사람이 지켜볼 것이다 여기서는 대부분이 밤에 오는 사람이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여기서는 대부분이 밤에 오는 사람이고 어떤 바람은 쉽게 썩는다 나는 둘 중에서 가운데 바람을 택하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몸으로 태어나서 잠깐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빈틈없이 공기를 껴안고 또 이렇게 우는 것이다 나는 겨우 괴로웠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이 문장은 어긋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와사상, 2002년 겨울호

 

그 섬에 가고싶다

 

모듬회 접시 한 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난자 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섬에


닿고 싶다

 

유령-되기

 

그 사이 나는 아프고 늙지는 않았어요

그날의 햇살과 눈부신 의심 속에서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 그게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이 생길 때도 되었는데

얼굴 다음에 표정이 사라집니다

윤곽이 사라진 다음에 드디어 몸이 나타났어요

내 몸에 없을 때 더없이 즐거운 사람


그 얼굴이 깊은 밤의 명령을 내린다면

누군가는 ‘아프다’고 명령할 겁니다

그날의 태양과 눈부신 의심 속에서


감정의 동료들은 여전히 집이 되기를 거부하지요

돌, 나무, 사람들의 데모 행렬엔 한 사람쯤

흘러다니는 내가 있어요


허공과 바닥을 섞어가며

흙발과 진흙발을 번갈아가며

공기가 움직일 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


그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없는 사람과의 이별

 

그가 사라지고 공기만 남았을 때

그렇게 말하던 그가 사라지고 공기만 남았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가 사라지고 그가 남는 버릇은 여전하여

대꾸를 못하는 내 버릇도 여전하여 참을 만은 하였다

그는 수치심 때문에 사라졌다 아니면 분노 때문에?


그가 사라지고 당분간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는 어제 쓰러져서 오늘 일어서고 바로 이 순간,

그의 부재를 증명한다 지금 바로 눈앞에서


그가 사라지고 그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공기까지 달아난다면 나는 공기처럼 서서

공기처럼 잘게 부서지며,


가장 멀리 있는 그에게로 가야 한다

그가 눈앞에 서 있는 이유다 충분히 불가능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주 부풀어오른다 폭발할 듯이


그는 그의 부재를 심어두고 방금 전까지 일어서서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다 수치심 때문에?

아니면 분노 때문에

 

시집,숨쉬는 무덤(천년의시작, 2003/1)


                    뱀인간

                   

                     수풀에서 뱀을 본 것처럼

                     처음에는 놀라고

                     나중에는 시장바닥에 섞여

                     다니는 그를

                     처음 보는 뱀처럼

                     찬찬히 뜯어보는 사람은

                     지층 높이의 눈을 가진

                     나다!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빌딩들이 자라고

                     비행기는 난다

                     뱀이 올려다보는 뱀의 눈이

                     무의미하다

                     내가 내여다보는 뱀의 눈이

                     무의미하다

                     하반신이 없다

                     머리와 꼬리 사이

                     다리는 지워지고 없다

                     꼭 그만큼의 배고픔이 있다.

                     (......)

 

돌멩이

  

갑자기 날아드는 돌멩이란 없다. 우연히 개입하는 전쟁

이 없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박힌 이 돌멩이도 어느 정도

는 충분히 예약을 하고 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속도로 어떤 솜씨로 돌멩이는 머리 근처에서 거미줄을 찢

고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바람은 흔들리고 있었고 몇 시

간 전부터 요동치고 있었고 거미줄 탓은 아니었다. 바람

보다 치밀한 계산과 바람보다 노련한 솜씨로 찢어놓은 거

미줄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거미는 죽었고

죽었거나 달아났고 돌멩이는 내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조

용히 들어왔던 모양 그대로 내 손을 만지작거린다. 약간

은 거칠게 다룰 것처럼.


 한 사발의 손


  사발이 있던 장소는 사발이 너무 커서 기억할 수 없다. 사발이 있던 장소는 사발이 있던 시간과 묘하게 겹쳐져서 지극히 짧은 순간 사발의 윤곽만 보여주고 사라질 것이다. 기록이 가능하다면 웅성웅성 남아 떠도는 한 사발의 감촉을 그 사발을 받쳐들던 손으로 아주 잠깐 불러낼 수 있다. 매끄러웠을까 아니면 울퉁불퉁했을까 따져보는 한 사람의 손이 기억하는 사발. 그 사발의 한순간을 들어올리는 손이 몹시도 무겁다.


  그리고 나는 사발을 보지 못했다. 사발이 있던 장소는 사발이 너무 커서 그 사발의 손바닥만 남아 있다. 쥐어보지도 똑바로 펴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지극히 돌에 가까운 형태로. 때로는 그 촉감으로.

 

시집,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잠입

 

내륙 깊숙이 강이 들어와 허리를 튼다. 물살이 물살을 되짚으며 올라오는 곳에서 희미하게 뱀의 꼬리를 발견한다면 그곳이 발원지다. 물방울이 맨 처음 시작하는 곳. 그곳에서 비는 집중적으로 증발한다. 바늘 끝처럼 가볍고 날카롭고 닿으면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번지는 하늘을 건너간다. 가까운 바다에서 먼 바다로. 전진하는 뱀의 꼬리가 잠입하는 곳에 성장하는 구름이 있다. 구름의 이동 경로는 그러나 맑은 날씨를 향한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날씨가 갑자기 온순해지면 솟구치던 파도가 받아먹던 수증기 하나 하나가 물결을 이룬다. 다시 보면 파도는 역행하고 있다. 육지를 향하여 마침내 뭍으로 기어오르는 바닷물을 위하여 있는 힘껏 아가리를 벌리고 강은 기다린다. 목구멍 너머 순순히 모래를 풀어놓는 하구가 보이는가. 파도는 점점 멀어진다. 슬그머니 지도를 기어나오는 뱀 한 마리는 다음 순간에도 그 다음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다. 제 꼬리를 찾아서 끝없이 똬리를 트는 바다가 흐른다. 내륙 깊숙이.

  

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아침마다 썩는 냄새가 푹푹 쌓이는 마을, 이 마을 정중앙엔 커다란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를 쌓아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날이 밝으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도둑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꼬
리를 잔뜩 세운 고양이들은 밤새 참아왔던 허기를 게워내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썩는 냄새를 꾹꾹 채워 넣는다  오전과 오후 내내  도둑고양이들이  만찬을 즐기는
동안 집집마다  인간들은 밤새 내놓을 쓰레기들을 장만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윽고
쓰레기를 장만하지 못한 집들의 불안과 초조에 뒤섞여 저녁이 몰려온다 저녁이 밤
으로 바뀌기 전에 도둑고양이들은 전봇대 꼭대기로 올라가고  잔업에 밀린 인간들
은 피곤함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쓰레기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가까스로 목표량에 도달한 인간들은 오늘도 무
사히, 안도의 한숨의 내쉬며 집으로 돌아간다

 

게릴라, 봄호(2000년)


판다

 

판다는 팬더곰의 일종이지만 메마르고 쓸모없는 땅을 팔 때도 유용한 단어다. 그것은 깊이를 가지고 있고 적당히 윤기를 두를 수도 있으며 뙤약볕 아래 구릿빛으로 빛나는 신성한 노동을 뜻하기도 한다. 적당히 포장되는 만큼 올라가는 가격이 판다에는 이미 들어가 있다. 판다는 그래서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제 자신의 뜻을 물건값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에 현혹되는 사람이 간혹 학문에 매진하는 이유를 캐내어 물어보면 평생을 다 보낸 뒤에도 나온다는 대답이 늘 그 모양이다. “한 권의 책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이 나를 여기로 보내었을 테지요. 그는 위인입니다.” 그가 잊어버린 것은 책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위인의 이름도 아니다. 그는 단어 하나를 망각하고 이름 그대로 매진해왔을 뿐이다. 그가 기댄 것은 학문이지만 학문 이전에 그를 사로잡았던 단어를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젊은 시절 그가 결심하였던 그 단어를.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행위에 열중했을 뿐입니다.” 붙잡혀온 사람들의 하나같은 변명이 그 단어에 매달리고 또 애걸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상행위에 열중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잡상인의 얼굴과 대답이 빤한 노학자의 얼굴. 판다에 열중하는 얼굴과 판다를 까마득히 잊고도 여전히 매진하는 얼굴의 모양새. 희끗희끗한 그 머릿결이 또 잊어먹고 있는 장면은 맨 처음의 구릿빛 피부와 곡괭이 자루에 빛나는 저무는 태양의 굵은 땀방울 같지만 판다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그걸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팬더곰의 일종이라는 그 단어를 무한히 파들어가는 사람의 얼굴. 얼핏 봐서는, 두더지의 일종 ; 판다.

 

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

 

내 죽음을 손질하는

 

내 죽음을 손질하는 당신이 내게 말해요. 맡겨놓은 제니는 잘 죽였어요. 살아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아침에 틔우는 제니꽃을 보고 알았지요. 아,제니는 죽었구나. 내 죽음을 손질하는 당신에게 내가 말해요.
그럼 이걸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혹시나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게 뭐에요? 내 죽음을 손질하는 당신이 내게 물어요. 자두나무 씨앗이네요. 전해는 주겠지만 장담은 못해요.
아마 제니 안에 들어가는 순간 죽어버릴 걸요. 아침에 틔우는 제니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살아있다는 거 제니꽃의 표정만 봐도 금방 알아요. 그러니 나만 믿고 돌아가요.
당신 죽음은 내가 확실히 보장해 줄테니까. 내 죽음을 손질하는 당신에게 내가 물어요.
그럼 당신 죽음은 누가 손질하나요? 몰라요. 제니한테 한 번 물어보지요. 제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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