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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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12. 11. 16:18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4년 <지평>과 <현실시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연장론' 당선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족 사진>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
2000년 제2회 백석문학상을 수상
산문집 <우리 앞에 문이 있다> <나들이 부산>
현재 계간 <문학과 경계> 편집위원

계간 <관점21> 편집주간 
계간 <시평> 상임선정위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편집위원

 

다대포 일몰


해지는 거 보러 왔다가
해는 못보고
해지면서 울렁울렁 밟아놓고 간
바다의 속곳, 갯벌만 보네

해가 흘려 놓고 간 명백한 지문
어서 바닷물을 보내
현장검증 중인 지문을 지우지만
갯벌은 해가 남긴 길고 긴 증거를
온몸으로 사수하네

시부렁 시부렁 등을 밀어붙이며
그 지문에 다 쓰여 있다고

한 여인이 재빨리 와
이 과격한 문서를
저 혼자 읽고 숨기네

뒤꿈치로 쿡쿡 밟으며
쑥쑥 지우며.

 

어머니 연잎


못 가득 퍼져간 연잎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 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고추

 

  수영장 탈의실에 줄 서서 삐약삐약 옷 벗는 아이들, 선생님이 시켜준 대로 벗은 옷 차곡차곡 바구니에 담는 아이들, 작은 고추 다 드러낸 아이들, 살색 그대로인 고추, 얼굴색 엉덩이색 그대로인 고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고추, 재잘대는 말소리도 살색, 쿨럭쿨럭 기침소리도 살색, 벌써부터 살색이 다 날아가고 없는 내 고추, 무슨 일인지 시커멓게 탄 내 고추


문학마당 ( 2006년 가을호)

 

바보 고기

 

낚시에 걸린 바닷고기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고 파닥거리는데

민물고기 당기면 순하게 스윽

따라온다는 약수터 중늙은이 말에

착한 민물고기

감탄을 내지를 뻔했네

 

바보 민물고기

 

마음 약해

아무 소리 못하는 내 꼴이나

유혹하는 대로 끌려오는 네 꼴이나

 

파닥거려야지 갈갈이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2000년 문학과지성사)

 

본전 생각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장에 오백 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도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원

그것을 입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애지 2004년 여름호

 

막걸리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허옇다가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다가
벌컥벌컥 샘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것
한 잔은 얼음 같고 세 잔은 불 같고
다섯 잔 일곱 잔은 강 같고
열두어 잔은 바다 같아
둥실 떠내려가며 기분만 좋은 이것
어머니 가슴팍에 파묻혀 빨던
첫 젖맛 같은 이것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

 
쑥국

       -아내에게

 

첨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때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굴쭈굴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 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시평 (2005년 겨울호)

                       
 얼음 호수

 

  한뎃잠을 자는 것들에게는

  두꺼운 얼음이 대로 방한복이다

  못 가득 바람 한 점 못 들어오게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기까지

  물고기는 물벌레를 먹고

  물벌레는 물고기의 배설물을 받아먹었다

  저토록 두꺼운 옷을 짜 입기까지

  못 안의 것들은 수면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마다하고

  바닥에서 뽑아낸 서늘한 실로

  쉴새없이 수면을 수놓고 있었다

 

  한겨울 난전에 좌판 벌이는 노점상에게는

  일찍부터 휘몰아친 칼바람이 추임새였다

  줄줄이 딸린 식솔들의 배고픈 손이 후끈한 보약이었다

  처음에는 손발이 차고 턱이 얼어붙어

  무엇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소한 넘기고 대한 가까워 오자

  팔뚝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어서는 몸에서

  확확 더운 김이 터져나왔다

  그 더운 입김 옆에서도 못을 덮은 얼음은 녹지 않고

  겨울 내내 멈추지 않았던

  물고기와 물벌레의 얼음 노동 옆에서도

  장사치의 손과 발은 얼어붙지 않았다.


  문학수첩 가을호
       
 연장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 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 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 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기도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에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가시

 

햇살에 묻어오는 바람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큰기둥선인장은

잎을 가시로 바꾸려고

제 몸 구석구석을 물어뜯었으리

허공 가운데 뾰족한 빨대 꽂고

있는 대로 바람을 포식하기까지

제 몸 구석구석

가시 아닌 곳 없었으리

뜨거운 태양의 양볼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저를 믿을 수 없었던 가시는

제 안으로 자꾸 파고들었으리

저를 찌르며 저를 할퀴며

목마른 그늘로 저를 내몰며

사막 가운데서 그만 죽어버리자고

제 밖으로도 가시를 곧추세웠으리

 

시집, 그림자 호수(창작과비평사)

 

개들

 

1.5톤 트럭에 실려 가는 한 무더기 개
보신원으로 가는 길인지
덜컹대는 짐칸이 만원이다
후미에 처진 잡종개 한 마리
너도 보신원에 가는 길이냐고
뒤따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떤 놈은 생의 속절없음을 알았는지
멍하니 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막바지에 처한 자신의 생을 수락이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고개를 숙인 놈도 있다
그 와중에 짝을 찾았는지
맹렬하게 교미하는 놈도 있다
옆의 개들이 엎드려 코를 박고
멀뚱멀뚱 그 사랑을 지켜보고 있다
개들은 이런 때일수록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안다
교미하는 개의 표정이
다른 데를 보며 침을 흘리고 있다
트럭이 신나게 달리다가 덜커덩 멈출 때
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꽤 오랜 시간 그러고 있는
개와 나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개도 나도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야성은 빛나다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게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 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연탄

 

왜 나에게만 달려드는 것이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을 삭이
지 못해 뭐라고 숨 막히는 함성을 내지르는 것이냐 왜 이리 오래 타는
것이냐 떨리는 내 몸에 기대어 뜨거운 날개를 말리는 것이냐 아무것
도 남지 않게 풀풀 날려서 왜 내 안을 하얗게 후벼파는 것이냐 가슴이
한꺼번에 막히도록 뜨거운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냐 그렇게 오래 찰떡
궁합이 되고도 아직 붙어먹을 게 남은 것이냐 온몸의 기운 다 빠져나
가 백발이 되고도 왜 껴안은 가슴 풀지 못하는 것이냐 너 말고는 이제
더 이상 붙어먹을 게 없는데 들끓는 날개 달아 승천할 게 없는데 그렇
게 오래 떨며 선 오랜 서성임들을 주저앉히는 것이냐 누가 걷어차면
흥에 겨워 저리 산산이 신명을 다해 부서지고 마는 것이냐 나보다 먼
저 서늘해져 나보다 먼저 흩어져 나보다 먼저 흙 속에 몸을 파묻는 것
이냐

뜨거웠던 한 시절에 대해
숨 막히도록 활활 타오른 그날에 대해
왜 영영 아무 말이 없는 것이냐

 

날아가는 메기 

 

끓는 냄비의 뚜껑을 열자
다 익어 날개를 단 메기 한 마리 날아올랐다

 

고마워요 당신. 나 물고기였을 때 날아 보려고 그렇게

파닥대고 솟구친 것 아시지요. 이렇게 날 수 있으리라고는

훨훨 승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어요.

그저 저 날렵한 꼬마물떼새처럼 날아올랐으면 날아올랐

으면 좋겠다고 시늉이나 하며 자꾸 물 박차고 훌쩍 훌쩍

위로 솟구쳤지요. 그런데 이거였군요. 이렇게 익어 흐물

흐물해져서야 끓어 넘쳐서야 날 수 있는 거군요. 몸 속 모

든 기운 우려내 보내 버리고 나서야 날개가 돋는 거군요.

그래야 한없이 부드럽고 가벼워지는 거군요. 여기 떨구

고 가는 살점들을 드세요. 큰 입 긴 꼬리지느러미 두고

갈 게요. 고마워요 당신

 

이거였군요 이래야 날 수 있는 거군요

여기 남기고 가는 아린 가시가
제 발목을 붙든 것이었군요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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