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차창룡 시모음 본문
1966년 전남 곡성
조선대 법학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 <쟁기질>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단 활동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문 당선
1994년 첫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문학과지성사)
이 시집으로 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7년 두 번째 시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민음사)
2001~2002년 인도, 네팔, 태국, 캄보디아 여행
2002년 세 번째 시집 <나무 물고기>(문학과지성사)
현재 중앙대, 경기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출강
인도신화에 관한 책 출간을 준비 중
쟁기질 1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 주인의 묘를 벌초해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마취된 이 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굼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을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희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에서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 오늘은 비를 만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싯다르타의 사랑의 체험담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없었다면
내 시는 이 말을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다니
그 사람 분명 존재하거늘
사랑을 잃다니
사랑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비 오는 밤
고속버스를 타고 창밖을
불빛 타오르는 저, 불빛
거미줄이 동여매고 있네
불빛을 향해 나방이 모여드는 한
불빛에는 거미줄이 걸리네
비 오는 밤, 물방울 맺힌
충혈된 눈아, 빛을 누지 마라
모든 빛은 거미줄을 배설하므로
거미줄에 걸린다
나방이여, 없는 거미줄에 걸리지
사랑을 잃다니
시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에서
목탁 2
몇억 광년의 세월을 흘러 별빛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속도는 보이지 않는 소리이다
날아가라 어서 목탁 소리여
이 목탁 닳고 닳아 먼지가 되면
돌아오리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며
아득한 광년의 거리 너머
빠른 속도로 천천히 떨어지는 목탁 소리
별은 먼지이므로
눈에 들어가 눈물 흘려보낸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여준다
시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에서
나무 물고기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창자를 꺼내고 허공을 넣으니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입에 문 여의주 때문에 나무는
날마다 두들겨맞는다
여의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도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나갔지만
시집 <나무 물고기>에서
도서관에서
지식의 배설물들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쌓아놓으니
참 두엄자리 장관이로다
이 거름 뿌리면 저 수많은 두뇌의 화초들
이파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리니
복사실에선 지식을 태우는 연기가 스모그를 이루고
사람들은 스모그 속에서 의식의 사리를 줍는다
계통적으로 정리된 나무의 납골당에서
진시황이 불태운 책 한 권을 꺼내드니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시체가 시커멓다
얇은 종이관에 안치된 시체들에게 소중히 경배하면서
우리는 제사장에게 우리들의 이름 한 점씩을 떼어주고
시체들이 제공하는 언제나 날것인 죽은 회를 음복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제사법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썩어가노라
달마는 지혜의 해골을 혜가에게 건네주고
혜가는 승찬에게 건네주고
승찬은 도신에게 건네주고
도신은 홍인에게 건네주고
홍인은 혜능에게 그 해골 건네주니
지혜 또한 썩고 또 썩어 다시 똥이 되는데
그 똥 먹기 위해 이렇듯 북새통을 이루니
똥을 퍼주는 배식원들은 자꾸만 불친절해지고
오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배고픈 사람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똥독을 소중히 받아 안는다
아 그 거름 모래비처럼 세상에 쏟아질 날
입 벌리고 기다리노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고행법이다
나무의 시체를 먹고 또 먹어
나의 뱃속에 도서관만한 나무 한 그루 뿌리내릴 때까지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에게서 나와 나를 낳고
먼저 죽어야 할 나의 고기로 회를 쳐먹는 시간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헛된 식욕을 위해
시간의 목탁을 두들기며 탁발하는
* 마태복음 1장 2~4절
시집 <나무 물고기>에서
기러기의 뱃속에서 낟알과 지렁이가 섞이고 있을 때
강가에 물고기 잡으러 가던 고양이를 친 트럭은
놀라서 엉덩이를 약간 씰룩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북으로 질주한다
숲으로 가던 토끼는 차바퀴가 몸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공기가 되어가고 있다
흰구름이 토끼 모양을 만들었다
짐승들의 장례식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긴 차량 행렬이 곧 조문 행렬이었다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소용없다
자동차가 질주할 때마다 태어나는 바람이
고양이와 토끼와 개의 몸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고양이와 토끼와 개의 가족들은 멀리서 바라볼 뿐
시체라도 거두려고 하다간 줄초상 난다
장례식은 쉬 끝나지 않는다
며칠이고 자유로를 뒹굴면서
살점을 하나하나 내던지는 고양이 아닌 고양이
개 아닌 개 토끼 아닌 토끼인 채로 하루하루
하루하루 석양만이 얼굴을 붉히며 운다
남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기러기의 뱃속에서
낟알과 지렁이가 뒤섞이고 있을 때
출판단지 진입로에서도
살쾡이의 풍장(風葬)이 열하루째 진행되고 있다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
내비게이션
-나는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알고 있다
너 있는 곳 알려줄까
별이 말을 걸었다
대지를 메운 장엄한 행렬 속에서 차는
망태를 들고 별을 따러 가듯
언덕을 기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화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내민 별은
꿈틀거리는 지도에
연신 붉은 줄을 그으면서 웃었다
네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그냥
내려다보면 아는 일인걸
하지만
뜬구름 위에 있는 넌 내려다볼 수 없으리
내게 물어봐
나는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알고 있어
경적이 조급하게 울었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문을 열어 바람으로
멍에가 된 붉은 줄을 지우려 하였다
그때 별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
제한 최고속도는
시속 구십 킬로미터 구간입니다
<문학과경계> 2006년 가을호
고시원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벽마다 책이 쌓여서 무너질까봐
그 위를 무거운 책으로 눌러놓고는
나를 포위한 책 속에서 행복하다
책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는
책으로 만든 장작불이야말로
최고의 다비식을 제공할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속처럼 아늑하여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
참 이상하다 사람이란
바람을 피해 바람이 없는 방을 찾더니
바람이 그리워 방을 옮기는 사람이란
바람을 배반하고는 바람에게 배반당하리
옮기자마자 북쪽으로부터 바람이 몰려온다
고립의 성채를 두드리는 바람 두려워
나는 확 창문을 닫는다
바람과 함께 들어오던 삼각산이
유리에 이마를 부딪쳐 푸른 피를 흘리는데도
<문학판> 2006년 겨울호
아쉬빈*의 후예들
세상에는 언제나 새벽이 되기 전부터 일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신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쌍둥이 신 아쉬빈은 여명이 트기 직전 일어나
새벽의 여신 우샤스를 깨운다
우샤스는 하나이자 여럿인 신이어서
아쉬빈은 바쁘다
아쉬빈의 후예들이 인간세상에 태어나니 곧
신문배달하는 소년들이라
소년들의 아버지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농부 아니면 일용직 노동자
역시 아쉬빈의 후예들이라
우샤스와 태양신 수리야와 아쉬빈과
농부와 일용직 노동자와 신문배달 소년이 한 집안이라
새벽에 길을 나서면 이 과거와 현재의 집안 내력을 훑어볼 수 있어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지만
벚꽃잎이 매달고 있는 영롱한 소리보다도 아름다운 호흡이 거기 있지만
소년의 바쁜 발걸음에는 목련꽃 봉오리의 보드라운 어루만짐
차라리 귀찮아 힘차게 신문을 내던질 뿐이다
하루가 밝아오기 전 가장 깜깜한 시간
한때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가난을 이기고 일어선 위인들의 이야기가 별자리였다
가장 어두운 시간을 견뎌야 아침이 온다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빵집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취한 연인이 사랑을 위해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꿈이여
소년이여
배우가 되고 싶으냐
국회의원이 되고 싶으냐
가수가 되고 싶으냐
CEO가 되고 싶으냐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냐
깡패가 되고 싶으냐
신문 속에 모두 있다
가장 암울한 시간의 신문 속에
한미FTA 체결은 결국 다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전체가 잘되기 위해 소수의 힘없는 국민은
경쟁력 없는 산업은 죽일 수밖에 없다는
온 국민의 눈을 제물로 삼아 더욱 성스러워진 신문을 배달하는
아쉬빈이여
눈 속에 사막이 들어갔나보다
후 불어다오
소년의 아버지는 한미FTA 반대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소년과 아버지가 함께 뛴다
우샤스를 깨우기 위해 소년은 신문을 돌리고
아버지는 소년이 돌리는 신문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핀다
가장 밝은 시간의 불로 지은 옷을 입는다
그것은 아버지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은 값비싼 옷이었다
* 인도신화의 아쉬빈(Aśvin)은 새벽을 알리는 쌍둥이 신이다. 아쉬빈은 새벽의 여신 우샤스(Uṣas)를 깨우고, 우샤스는 남편인 태양신 수리야(Sūrya)를 깨운다. 우샤스의 언니인 밤의 여신 라트리(Rātrī)까지 포함하여 한집안이지만, 이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일은 없다.
<문학수첩> 2007년 여름호
2007 봄 일요일 대학로 산책자의 몽상
나무의 날개가 돋아난다
나는 나무의 날개를 떼어서 만든 옷을 입고 비와 바람으로 기른 쌀을 햇살에 버무려 지은 밥을 먹고 모래로 세운 집을 나선다
물 먹은 솜으로 만든 인형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사람들은 고기를 구워 그 향기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희생제의 풍경은 아름답지도 아름답지 않지도 않다
희생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국적이다
하늘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땅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바람의 백성도 아니고 물의 왕도 아니고 불의 신하도 아니며
필리핀 국민도 아니고 한국 국민도 아니고 떠돌이도 아니고 정착하지도 못했으며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불교 신도도 아니고 힌두교인도 아니며
그저 자신의 몸뚱이를 제물로 바쳐 자신의 몸뚱이한테 제사를 지내는
어떤 인형들은 얼굴의 살을 떼어 제사를 지내고
그를 메우기 위해 허벅지 살을 떼어붙인다
신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쉬바의 아들 가네샤의 머리가 달아나자
쉬바는 가네샤와 생년월일이 같은 코끼리의 머리를 떼어다 가네샤의 목에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성형수술이 시작되었다
입 속에 길이 있고
문이 있고 집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영화관이 있고 도시가 있고 촌락이 있고 나라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하게 공중에 붕 떠다니는 아파트가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타갈로그어로 기도하면 중국에서 몰려온 황사가 그득하다
나는 제사장들과 더불어 고기를 구워 입 속에 그 밑 빠진 제단에 집어넣는다
논밭도 없는 아스팔트 길에서 농부들은 농기구를 들고 모여 제사를 지낸다
“에프티에이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신의 은총을 입은 개나리꽃과 진달래꽃과 목련꽃과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화들짝 피어나고 신의 은총을 입은 노숙자들도 제삿밥을 타 먹기 위해 줄을 선다
나무들이 날아오른다
<문학수첩> 2007년 여름호
출처, 시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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