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진은영 시모음 본문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년 문학과지성사)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2003)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
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2003)
악어를 위하여
자 덤빌 테면 덤벼봐
악어는 정글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다
복병처럼 숨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상이여
나의 납작해진 뒤통수를 보아라
질척질척한 늪, 진흙 속을 뒹굴며 헤엄치다
가끔 열려 있는 하늘 위로 홀로 비상하는 것들을 보면
악어는 입을 쩍 벌린다
단 한 입에 끝내주겠다는 듯이
이 정글의 어떤 사내도
그놈을 길들일 순 없지
어느 새벽녘, 여린 풀잎의 꿈들이
놈의 슬픔을 어루만질 때
진흙 밑에 숨겨오던 희고 부드러운 배를
슬쩍 드러내겠지만
정오의 햇살 사이로 숲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는 계절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어느 날
사냥꾼들은 맥주로 검은 수염 적시며
승리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 순간에도
그 이름을 두렵게 불러볼 것이다
악명 높은 동물이여
죽어서 고급 피혁 제품으로 변신한 뒤에도
복종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갖는 비장미를 자랑하며
번쩍이는 그 이름. 으, 악, 어
대학시절
내 가슴엔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1
여자가 이사오던 날 밤
어둠은 글라이올러스처럼 피어났다
여자는 방에서 나와
마당 끝에 있는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둔중하게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여자가 없을 때
몰려와 창고 문을 두드려보았다
이웃집 K가 말했다
- 그녀는 귀중한 걸 넣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용감한 X와 Y가 열쇠를 훔쳐왔다
여자의 열쇠가 말했다
- 무언가 대단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문밖 구멍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2
모두의 이마 위에
번쩍이던 철문 위에
시간의 부드러운 염산 방울이
똑, 똑, 떨어져내렸다
붉게 썩어가는 창고 앞에서
다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 무엇이 들었습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 무언가 귀중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그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금했고 그녀도 그랬다
모두들 문을 열어보기로 했고
넣어둔 것을 기증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돌렸다
창고 속으로 별빛이 쏟아지며
텅 빈 안이 환하게 드러났다
여자와 사람들은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굉장한 것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가두었기 때문에
그날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 시계를 뒤집어놓았다
동서문학 2004년 여름호
가족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바깥 풍경
1
강의 상류에 살았다
살았지만 더러웠다 시작답지 않게
첫발부터 진창이었다
딴 아이들 놀다
돌아오는 먼 하루
강물 위로 공장의 그림자가
진다고 했다 그 어디쯤
아버지 무얼 낚고 계실까
소문만 무성하던 그빛 고기떼
어디로 갔는지, 흐르는 폐수 사이
언뜻 본 듯 만 듯
2
유년의 깨진 창 틈으로 할머니
들어오신다
망할년, 밤에 무슨 휘파람이야
뱀 나오라구요 뱀아 제발
나오렴 독 품은 이빨로 뒤꿈치 좀 물어줘
당신이 던진 술병에
아침 산산이 빛나던 마당의 햇빛
3
엄마 일하러 갔다 나만 남기고
일렬종대로 서봐, 동생들 구령을 붙였다
하나
둘
셋
엄마 가슴에 훈장처럼 매달려 있어야 해
우리 모두 명예롭게
퐁당퐁당 돌을 더언지자, 돌멩이 같은 동생들
누이 몰래 던져졌으면, 몹쓸
계집애 넌 큰 언닌데
걱정 말아요 다시는 수면위로 못 떠올라도
매달고 가라앉아 그 애들
엄, 마, 제, 발, 독, 촉, 하, 지, 마, 세, 요,
슬쩍 흘겨보면 강풍에도 플라스틱 꽃처럼
잎사귀 하나 떨구지 않던 어머니, 이상도 하지
내 어린 숨결에도 시드시네
4
어디로 숨어야 할까, 나는
자꾸 기어 들어갔다
동화책 크기만 한 꿈 속으로
집에 꽂힌 책은 다 읽었다 단 세 권만
읽혀지지 않았다 아버지, 엄마
아버지의 엄마
아무 때나 덮고 치울 수 있다면
이제 나는
숨을 곳도 없는 스물세 살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눈물났다
풍경, 내 마음의 바깥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짚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쌘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통권 133호)
귀가
나는 드릴처럼 튼튼한 이를 가진 쥐였다
내 가족이 사는 집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내고 숨어들고 싶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
집에 가려면 수챗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당의 내부를 장식했던 꽃 쓰레기들과
제사 때 먹다 버린 과일들
누군가 시궁창에 매달아놓았다
파란 모기떼 인도하는 어두운 길 따라가면
오! 내 어머니 사시는 곳
나는 돌아왔다
집의 붉은 혀가
깊은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메피스토 왈츠
뚜껑과 시신을 잃어버린 관 속에서
붉은 샐비어꽃들이 피어날 때
밤이 깜짝 놀란 두 눈썹을 치켜뜨고
묘석 모양이 담쟁이 잎을 응시할 때
불안이
부서진 어깨뼈의 십자가에서 포도송이처럼 열릴 때
사물 하나를 물고와 심장의 텅 빈 수조
어두운 피의 찰랑거리는 기억 속에서 헤엄치게 할 수 있다면
다시 낯선 비밀들이
몸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도기의 깨지기 쉬운 색갈에 포박되어
미친 양탄자의 춤 위에 올라탈 수 있다면
모든 구멍을 틀어막는 슬픔의 막대기여
무취의 거리를 짓이기며 달려가는 라벤더 꽃잎의 타이어
고대 화폐처럼 닳아버린 달의 입술이여, 사라진 역병들이여
어둠의 찢어진 자루에서
썩은 양파들이 굴러 떨어지는 밤
네가 마시는 알코올 속 얼음으로 녹아들기 전에
바이올린 화염으로 흰 자작나무 언덕을 모두 태우기 전에
그가 왔다
나의 죽은 귓속에서 푸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현대문학 2006년 2월호
청춘 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은 알지 못한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고
서성거렸다, 꽃이 피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교실에서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백주대낮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시제에게 쫓겨난 사람들이
길 위를 메우고
앰뷸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
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
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물고기들이
노란 사이렌을 울리고
놀라서 고개 돌리면
저녁은 이미 교실 안으로 와 있다
칠판에는 백묵으로 무언가 적혀 있고
어둠 속에서 글자들은
너무 멀리 있어 이름을 알 수 없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하루 종일 침묵한 입을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야간노동자
한때 아침은 단단한 울타리
별들이 목장에 쳐놓았다
한때 별들은 얌전한 짐승, 울타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아침으로 쉬러 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고요한 짐승, 벌떼
스물아홉 살의 아침이었다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충혈된 입에서 벌어진 눈에서
시간이 질질 흘렀다
세워놓은 아침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풍경
난폭해진 짐승들 달아났다 아침을 밟고 간다
목장 너머
달아난 짐승들 떠돈다
점점 멀리……
나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밤이
해고하러 올 때까지.
한밤중에
고양이는 지붕의 알리바이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움켜쥐고 지붕의 붉은 울음이 솟아났다
벨벳의 검은 꼬리가
지붕의 등을 오래오래 어루만졌다
죽은 장미를 버렸다 항아리의 고인 물을 따라
붉게 떨리던 시간의 한때가 하수구 속으로 흘러갔다
장미는 항아리의 알리바이다
크고 검은 장화속에서 흰 발이 걸어나왔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한밤중에
빈 항아리를 힘껏 껴안았다
내가 부서졌다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 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첫사랑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 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갔다
어제
나는 너를 잊었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내 집 우리창이 녹아버린다, 벽들이 흘러내리고
시간의 계곡으로 나는 내려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고 싶었다
오 귀여운 강아지, 강아지들,
내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플라톤이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베낀다
어떤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목소리는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다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판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
나의 할머니
아침 거미줄로 뒤덮인 검은 장롱이었다
쿠마이의 여자 무당처럼 점점 줄어들었다
항상 커다란 치마를 입었다
바람의 부드러운 대패질로 모든 것이 얇아졌다
나의 오므린 무릎 사이를 빠져나가는 갈색 종이였다
킬킬거리며 그녀는 커다란 치마를 펼쳤다
기차 삼등칸처럼 함께 붙어 실려가던 탄식의 선홍색 의자들
노란 치자꽃잎처럼 겹겹이 모여든 세간에서 술과 오줌 냄새
썩은 이빨 나기 시작한 어린애가 소리를 질렀다, 웃었다
오므린 입술의 주름을 타고 흐르는 한두 방울 알코올 속에서
장마가 지고 겨울이 몇 번 커다란 입을 벌리고 지나갔다,
모든 순간과 짝 지어가는 고통의 무리들을 가득 실은 방주를
얼어붙은 가슴으로 천천히 밀면서
그녀는 잎이 진 월계수 가지에
한 장의 젖은 카드처럼 매달렸다
나는 가지를 툭, 부러뜨려 땅 속에 묻었다
별은 물고기
해왕성 건너 명왕성 건너
밤
하늘에 사는 물고기
아가미 열릴 때마다
별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것은
날카롭습니다
한 여자 맞습니다
흰 목덜미가 길고 붉게
잘렸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메고 가서 바다로 던집니다
목을 베인 그 여자, 아가미 얻었습니다
부레 가득히 공기를 채워
밤하늘 위로 떠오릅니다
헤엄치다 건드립니다
또 한 사람 맞습니다
별에 맞아 죽습니다
거인족
별은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나는 화가 나서
해를 향해
술병을 던졌다
해가 산 뒤로 슬쩍 피하며
딱딱하고 캄캄한 하늘이
술병에 부딪혀 깨지며 쏟아졌다
별은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나의 눈동자 속으로
유리 조각이 산산이 쏟아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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