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조용미 시모음 본문
1962년 경북 고령 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1990년 한길문학에<청어는 가시가 많아>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96년 실천문학사)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2000년 창작과비평사)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2004년 문학과지성사)
제16회 김달진문학상
흩어진 꽃잎 위에
지난 생에 나는 당신께
일곱 번 세상을 꺽어 바쳤다 합니다
꽃잎이 흩어집니다
꽃잎 자꾸 흩어집니다
꽃잎은 고개를 돌립니다
물방울이 됩니다
눈물방울이 되어 당신의 이마 위에 제 뜨거운 몸을
다시 떨어집니다
꽃잎 다 흩어집니다
흩어진 꽃잎 위에 당신을 누입니다
오늘은 달과 몸에 너무 기울어 있는
나를 꾸짖습니다
물 위의 길
바람이 일어
수로(水路) 위에 또 물길이 곱게 생겨난다
물 위에 일어나는
물의 길
물에는 무슨 길이 저리 많은지
물은 무슨 길들을 저렇게도 많이 숨기고 있는지
저 많은 길들을
동그랗게 하나로 모으는
사람이 오래도록 외롭게 서 있는
그 언저리
물 위로 난 길들이
사람의 길이 될 수는 없어
쓸쓸함이 멀리 번져 나가는
그 반짝이는 해질 무렵의 수많은 길들이
流謫
오늘 밤은 그믐달이 나무 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저 나무는
제마음 다스리지 못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푸른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내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 같이 어둡습니다
마량 간다
대웅전 사분합문의 어칸에는 커다란 검은 날개를 가진 나비 열두 마리가 붙어 꽃살문의 장엄을 이루고 있다
노란 연둣빛 등을 한 동박새들이 반짝이는 동백 잎과 눈 덮인 동백 붉은 꽃들 사이를 장엄인 듯 날아다닌다
수륙재를 베풀어 물고기에게 죄의 업보를 씻어주는 벽화에서 동백 숲까지 검은 나비가 떠메고 가는 꽃살문은 죄의 빛깔 따라 푸른색이다
푸른빛과 섞이는 붉은빛 따라간 칠량에서 마량까지, 늙고 오래된 푸조나무가 있는 당전마을을 지나치고 말았다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내 머릿속에서 또 한동안 꿈틀거리며 맹렬히 잎을 피우겠다 내게 처음부터 늙은 나무였던 내가 보지 못한 그 나무는
마음에 담아두고 펼치지 못하는 것은 병든 몸과 같다고 중얼거려보는 구불구불 좁은 바닷마을 길
곽탁타는 어떤 영혼을 가졌기에 옮겨 심은 나무마다 살아나고 무성히 자라나 가득 열매를 맺었을까 탁타가 가꾼 것은 나무일 뿐 아니라 그의 등에 난 혹 또는 세상의 이치,
아무도 모르게 낙타처럼 굽은 등을 쭉 펴보았다가 다시 구부리는 것, 머릿속에 늙은 푸조나무와 검은 나비를 키우기보다 집에 두고 온 산부추분을 살려내야 하는 일이 먼저인 걸 알겠다
나는 늙은 푸조나무도, 밤나방처럼 가만히 붙어 몇백년이라도 꽃살문을 떠메고 있으려는 커다란 나비경첩이 주는 무거움도 내려놓고 꽃살문 앞 떠난다 마량 간다 까막섬 간다
가시연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린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양귀비
불씨가 하얗게 숨을 쉬고 있는,
아직
불이 나지 않은 집
이제 막
불이 붙으려 하는 집
창 틈으로 내다보이는
흰 양귀비가
가득 숨쉬고 있는 마당
단 하루만 타올랐다 꺼지는 불
양귀비,
빛을 내뿜고 있는
아편꽃이 피어 있는 마당 안으로
누가
걸어들어왔다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는
적요한 마당 안의
흰 양귀비
아래 너울거리는 붉은 꽃들
단 하루의
양귀비, 양귀비
활활 빛을 내뿜고 있는 흰 꽃에 바쳐지는,
불타고 있는
빈 집
비누방울
비누방울을 날린다
크고 작은 것들,
아이는 비누방울을 날리기 위해 태어난 듯
온 정신이 거기에 다 팔려 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지붕 위로, 나뭇가지 위로
골목으로.......
날아가다 그것은 꺼진다.
아이 눈에 꺼지는 비누방울은 없다
허망을 바라보는 것은 오직 나의 눈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누가 알았을까
저 비누방울이 잠시 공중을 흔들어놓았다는 걸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비누방울은 그 속에 무엇을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저리 가벼운 것이다.
장대비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옛집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城,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이사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 닫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적거謫居
당신이 없는데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당신이 없는데 당신 사진이 웃고 있다
보리밭에 보리들이 술렁인다
당신 책상 앞에 밤새 개구리 울음소릴 듣는다 당신 없이
걸어다닌다 술을 마신다 여행을 한다
돌아와서 나 혼자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
어쩌다 당신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려눕힌다
벽지에 탱자나무 흰 꽃이 사방연속무늬로 피어났다
꽃들이 소리 없이
소리만으로 나무와 바람을 만난 적이 있다
두 귀와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바람이 지나는 길을 따라갔다 돌아오면
어둠이 지친 몸을 오래도록 쓰다듬어주었다
어둠에 기대어 죽은 듯 쓰러졌다
오래 어지러운 잠을 잤다
겨울이 지나고 내가 들은 풍경들이
천천히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을 떴다
그때,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났다
작은 새의 죽음
죽은 참새가 마당에 떨어져 있다
목련나무 아래
납작해진, 이미 며칠이 지난
새의 주검
질경이 위에 누워 있는
그 작은 것을 나는 그냥 둔다
목련나무 아래 잠든 새의 죽음을 보라고
꽃이 떨어지듯
풀이 마르듯
고요한 시간들을 그냥 두고 보려고
상복보다 더 하얀
새의 죽음
저 작은 새의 죽음만으로도
모든 봄을 다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
허공 속에 잠시 피어난
붉은 꽃들,
죽은 것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다
바라본다
나는 바라본다
내부의 나를
하지만 늘 나의 내부에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나는 의식의 바깥으로
즐거운 외출을 한다
나의 내부는 그것을 허락하고 있다
내부의 나는 내부 밖의 나를
바라볼 수 없다
나의 내부는 바라보는 행위를
할 수 없어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그 외로움으로 나의 내부는
내부 밖의 나를 마구 흔들어댄다
내부 밖의 나는 나의 내부에 의해
강하게 지배된다
하지만 내부 밖의 나는
나의 내부를 바라볼 줄 아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 힘으로 가끔 詩를 쓴다
지금 나의 내부는 황폐하다
나의 내부가 내부 밖의 나를
그렇게 지배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가
포도송이처럼 영글어가고 있는 나의 꿈을
뚝뚝 떼어내며 웅크린 내 잠에
확 불빛을 쏘아대었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어둡고 따쓰한 잠 속에 끊임없이 울려오는
무거운 물방울 소리들
신성한 외로움에 빠진 나의
둥근 영혼을 누가 불안하게 하는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머리가 먼저
으깨어진다 세상에 대한 불길한 나의 사랑이
누군가를 붉게 물들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제목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채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이때 폭풍은 나무의 편이다
나무들은 폭풍의 힘을 빌려 내게로
침입하려 하고 있다
속이 울렁인다 저 나무들의 혼이 들어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머리칼에 바람이 갈가리 찢긴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와
약한 나무들의 혼을 찾아 멀리 달려가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흔적
용주사 뒤뜰 정자나무 위
까치 한 마리,
저대로 정자나무잎이 되어버렸나
정자나무에 붙박혀
앉아있는 건 내가 아니라 흔적,
이라고 말한다
양철 물고기가 노을을 바라고 있다
어떤 바람도 이 정적을 깰 수 없다
숨구멍
언 못에 싸락눈이 덮인다
못에 숨구멍이 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정수리에 뚫려 있는
얇은 창호지 같은 숫구멍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숨구멍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며 땅기운이 드나들기도 하고
영혼이 숨을 내뱉기도 하는
그 구멍은
얇은 막으로 덮여 있다
얼음이 덮이니
나무그늘 아래로 물이 파랗던 여름보다
물은 더 살아 쌔근거린다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물을 다 덮어버릴 수는 없다
눈 덮인 못에 검은 숨구멍이
여럿 나 있다
물이 숨을 내뿜는 곳이다
어떤 숨구멍은 장수하늘소를 닮았고
어떤 것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닮아 있고
저 숨구멍은
원생동물인 아메바를 닮아 있다
못이 숨을 쉰다
저 못은 답답한지 우묵하고 검은 숨구멍을
가끔 들썩이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이 어쩌다 숨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숨구멍은
가장 큰 숨을 쉰다
현대시 2004년 8월호
비
당신이 내게 두고 간 것,
당신이 나에게 주고 간 것,
다 못 주고 간 것,
하려던 말줄임표 같은 말들을
나는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준 아주 사소한 것,
내가 당신에게 주어야 할 남겨진
그토록 많은 것들 위로
비가 내린다
사 년 동안 한 번도 그쳐본 적 없는 비가,
잠깐 날이 개일 때면 그 사이에도
나는 비가 그리웠다
당신은 무덤에 아주 긴 풀들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나는 잡초를 뽑았다
진득진득한 풀꽃이 팔목에 들러붙었다
수북하게 풀무덤이 옆에
또 하나 쌓였다
겨울 오동나무
지난 겨울 어디에서나 내 가는 길 끝에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죽장 다녀오던 길, 알 수 없는 碑文들과 어떤 이의 무덤이 견고한 城砦를 이루고 있던 그 길 앞에 一柱門처럼 서 있던 두 그루 오동나무
밤이면 봉황이 깃들여 오동나무 텅 빈 열매들 주렁주렁한 가지마다 금빛가루를 터뜨리고 오동나무 몸을 빌린 악기들은 죽은 자를 위해 달빛 아래 弦을 뜯을 것이다 구름은 어두운 하늘을 천천히 흐를 것이고
오동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뻗어나가는 낯선 길들,
텅 빈 棺, 짚신, 모자, 구리반지 그리고 수의...... 죽은 자의 방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겨울 정오의 햇살이 찌르듯 나를 관통해 갔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놓여 있는 內通門, 그 좁은 길, 오동나무 곁에서는 죽음조차 가볍다
魚飛山
물고기의 등에 산이 솟아올랐다
등에서 산이 솟아오른 물고기는 幀畵 속에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물고기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탱화 속의 물고기를 나는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커다란 산을 지고 물 속을 떠다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아도 등에 돋아난 죄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魚飛山에 가면 물고기들이 날아다녔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산에 가는 것을 미루다 물고기의 등을 뚫고 나온 사리를 본다 물고기는 뼈를 삭여 제 몸 밖으로 산 하나를 밀어내었다
날아 다니는 물고기가 되어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비가 쏟아지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萬魚山과 골짜기에 있는 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 물고기떼의 적멸, 폭우가 쏟아지던 날 물고기들이 내는 장엄한 풍경소리를 들으며 만어사의 옛스님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탱화 속의 물고기와 어비산과 만어사가 내 어지러운 지도 위에 역삼각형으로 이어진다
등이 아파오고 남쪽 어디쯤이 폭우의 소식에 잠긴다 萬魚石 꿈틀거리고 눈물보다 뜨거운 빗방울은 화석이 된다
시집,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꽃이 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꽃이 진 후에
꽃이 진 후의 일들을 나 이제 겪어야 하네
달콤하고 수상쩍은 냄새가 났던 봄밤
봄날 누워서
꽃이 피는 소릴 들으며,
머리를 빗고 일어나 나가보면 천지에
꽃들 이미 다 져버린 뒤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되었네
꽃이 진 후에
봄날 나의 침묵은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 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던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며시 등뒤로 와 나를 껴안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노자 [도덕경]에서 인용
유도화 긴 잎으로
유도화 긴 잎으로 내 가슴을 찌르고 싶다
그러면
고여있던 말들이 콸콸 쏟아져나올까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말들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며 마구 뛰어다닐까
그걸 다 끄집어내고 나면
냄새도 나지 않는다지 썩지도 않는다지
아름다운 몸만 아슬아슬 남는다지
그 자리에
진통제 대신 해와 바람과 시간을 채워넣으리라
그러면 나는 오동 어두운 나무 두 그루를
양 옆에 세워두고
천년이 넘도록 오래오래
말없는 자의 지복을 누리겠네
빈 몸 따스하겠네
그 땐 무얼 말하고 싶어지겠네
갈대를 타고 긴 강 건너지 않아도 좋으리
다라수 잎사귀에 새겨진 經을
읽지 못해도 좋으리
유도화 잎도 나처럼
맥이 잘 잡히지 않는다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窓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밖에 서 있다
다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밤하늘에 난 저 무수한 상처들,
저걸 다 만져보고 있노라면
내가 파릇파릇 살아난다
눈이 떠지는 이 환함……
잔혹한 태양과 감미로운 바람,
감미로운 햇살과 뼈가 삭아내리는
잔혹한 바람 사이를 오가며
오후 네 시,
하루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함축해놓은 시간
길에 미친 내 불안한 영혼을
지그시 눌러주는 음악들
꽃이 핀다
현실만으론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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