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제1회 '시인시각' 신인상 당선작 / 김우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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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시인시각' 신인상 당선작 / 김우섭

휘수 Hwisu 2007. 8. 18. 01:29

제1회 '시인시각' 신인상 당선작

 

나무 외 4편 / 김우섭


나무가 서 있었지

 

찬비를 맞으며 나무 한 그루 서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우산을 쓴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리죽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젖은 이파리들이
갑자기 환하게 생기가 돌고
수많은 귀를 열기 시작했지

 

나무는 귀가 천 개도 넘어
어떤 귀는 노래를 담아 홀로 듣기도 하고
어떤 귀는
비 내리는 소리를 따라 먼 곳까지
흘러가기도 했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노래도
빗줄기도
나무의 귓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밤새 어두운 길만
소리 없이 반짝거렸지

 

이른 아침,
골목에는 떨어진 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나무는
남은 귀를 마저 열어놓은 채
온 몸이 비에 젖어있었지
소한과 대한을 지나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은 귀들이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무는 그렇게
침묵의 빛으로 서있었지

 

송현반점

 
그대가
입에 물었던 사탕을 꺼내어 내게 줄 때
창가에 자라던 곰팡이들이
노란 꽃을 피우네

 

아프지도 않은데 겨울이 다 지났다

 

다다미방에 앉아 엽차를 마시다
불현듯 나누는 그리움
오호츠크 해에서는 둥그런 편서풍이 불어오고
가슴 속 목록마다
압정처럼 박히는 별빛들
 
네 생각만으로
계단이 젖고
계단이 뿌리인 집이 젖고
집보다 큰 물방울들이 씨앗을 꺼내 河口로
흘려보낼 때

 

밤새
마른 귓불이 간질거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눈
밑둥만 남은 보리밭 속에서
조잘대는 씨앗들
기억이나 하려는지
오호츠크 해에서 따뜻한 편서풍이 불어올 때

 

그때쯤 
    

무릉 가는 길

 

한쪽 눈 시퍼런 남자
버스정류장 쪽으로 뛰어간다
굽은 등 뒤로
추스르지 못한 숙취와
뒷굽 닳은 구두가 바쁘게 따라가고
버스가 성당모퉁이를 돌자 이윽고
밤이 되었다

 

정처 없다, 라는 말
황홀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향해
누렇게 뜬 얼굴로
철 지난 달력처럼 한 쪽 어깨가 내려앉았다
수저를 들고 앉아있기 민망한 날들
거울을 향해 한 대 정통으로
맞히고 싶은 날들

 

짝이 틀린 양말처럼 왠지 불편한 걸음으로
이제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길
그 끝에서 만나는 어둠에게 남은 열망을 덜어주고
빈 주머니 탁탁 털어
은밀히 나누던 일까지 아주 잊어버리게
피곤한 고백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만
낮은 언덕을 넘어가는 일몰의 시간만큼만

 

내 발의 꿈을 용서해 주었으면  

       

그 집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든 아픈 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꽃밭을 이루고, 꿈을 꾸듯 아득해 하곤 했다
간혹 그 꽃들의 뿌리가
사내의 잠자리까지 찾아 들어와 힘들게
몇 개의 씨앗을 틔우기도 했다
아침마다 신문이 오고, 그것이
세상과 유일한 만남이었으므로
차가운 마루에 앉아서도,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를
낼 때도, 창 밖 화단이 바람에 수런거릴 때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어떤 결별의 후일담을 읽는 듯 했다
가끔,
집밖의 일이 궁금할 때면 기타를 꺼내
오래 전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불러낸 물소리들이 기타를 적시고
세간을 다 적시고, 어딘가 숨어있던
마른 머리카락들이 둥둥 떠올라 그리운 손길처럼
사내의 어깨에 내려앉곤 했다
잊히지 않을 날들이 첨벙첨벙
가을을 질러오다 뒤뜰 감나무에 붉게 걸리면
빛나는 깃을 가진 새들이 찾아와
너무 늦었다는 듯
위로의 말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의 집에는
모든 아픈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밤이면
산등성이까지 환하게 별이 떠올랐다
세상의 잃어버린 길과 무성한 소문들이
안개처럼 집 주위를 맴돌고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창밖의 불빛 따라
몇 개의 꽃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간혹
아픈 관절을 꺾듯 누군가 눈 밟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려오곤 했다

 

미조항

 
이곳에서
길이 끊긴 것은 아닐 게다
붉은 단풍잎 같은 불가사리들
언덕을 이룬 겨울 미조항
따뜻한 모래밭 사이로
지친 두 발 담그면
불빛 가물거리는 너머에
늦은 세월의 길도 새로 피어나고
오랜 물결소리 어깨를 지나
錦山 쪽으로 사라질 때
네가 실어 나르는 것은
네 몸만이 아니구나
 
죄를 씻으려고 온 것은 아닌데
가슴엔 때가 끼고
고깃배를 따라오는 흰 새들처럼
낮은 울음 비추는 등불을
우리도 만날 수 있을까
밤새도록 길은 자주 끊기고
온 정신을 깨우는 차가운 고요
방파제를 치는 파도소리
붉은 이파리들만 올라오던 그물 사이로
푸르게, 간혹 반짝이며
지나쳐 간 새벽의
쓸쓸한 저쪽

 

1966년 인천에서 태어나 지금껏 그곳에서 살고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