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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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숙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2. 3. 00:08

1966년 경남 의령군 봉수면
동의대 도서관학과
2002년 ‘문예한국’ 신인상으로 등단
경남문인협회
의령문인협회 회원

 

나는 촌년이다

 

나는 촌년이다
구슬리는 말투도
반짝이는 구두도 어울리지 않고
검푸른 하늘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더 편하고
시끌벅적 사람 많은 거리보다
풀들이 길바닥까지 마중 나와
그간의 고향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꼬부랑 길
그 길에 들어서면
마침내
어머니 자궁같이 편안함을 느끼는 나
이런 나는
촌년이다

 

병실

 

310호
아기를 낳지도 않았는데
방구들은 내 등허리를 적시고
내 삭은 발가락 끝을 뜨겁도록 데운다
미안하게도 나는 딸을 낳은 일도 없는데
출산한 산모의 가운을 두르고
산모들이 먹는 미역 줄기를 핥고 있다
밖은 바람도 잠을 자는지 심심한 가로등
제 앞길을 밝히고도 내 마음까지 비추고 있는
늦은 밤도 아닌 초저녁
병문안을 온 식구 몇이 오늘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풀지 못할 이야기들 빈 시트를 메우고
감아 오른 붉은 장미 이파리에도 맺힌다
내가 언제쯤이었던가
장미 이파리에 걸린 이야기를 본 지가
다소 불편한 아픔들이 나에게 찾아와
숙식을 하곤 있지만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병실 310호는
마당이 없는 곳인데도 시인은 시를 읊고
여 간호사는 졸린 눈으로
시보다 더 난해한 환자의 주사액을 점검한다

 

우려내는 일

 

국수장국을 끓이다 간을 본다
그저께 끓인 장국은 조선간을 하지 않아
싱거운 옆집 아저씨 같았는데
오늘은 미리 간을 하고 끓였더니
심심한 국물이 입에 딱이다
부엌 한켠,
감미로운 조미료에 밀려
마지막 제 몫을 한 날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여 서글픔으로 남았을지라도

지난 시절
포옥 우려낸 맛을 원할 때면
요란하지 않았고
성급하게 나서지 말았으며
끊임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소박한 이치
가난한 안주인의 손끝으로 스몄던 날들
아직 내 장마 속에 배어있으니
까마득하여도 기억할 수 있으니
그리 슬픈 까닭도 아니다

심심한 간에 국수를 만다
나와 같은 세월을 닮은 막사발에
새초롬히 앉은 자태는
조선여인의 정직처럼
마알갛다

 

혼자 먹는 밥

 

숟가락 낮게 드리운 식탁에
혼자 앉아 밥알을 헤아린다
서투른 밥알로 나누었던
내 그리운 유년은 어디로 갔는지
어머니 가난한 밥상이
모질게도 그리운 이 아침
성글은 밥상에도
정만은 펄펄 끓는 숭늉이었던
그 시절도 있었을 테지만
모두 떠나가고 적막한
이 부유하면서도 서러운 시간
이제는 혼자의 길을 가야 할
서글픈 나이
힘든 강산의 무게
몇 번이나 업었는지 헤아리지도 못할
나의 어머니는
지금 텅 빈 밥상에 앉아
무엇을 덜어내고 계실까
혹여, 빠진 밥상다리만큼
세월을 접고 계시지는 않을까
여느 때보다 오늘 아침은
텁텁한 밥알이 자주 목구멍에 걸려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아주 긴 공양시간이다

 

완행버스

 

많이 가진 사람은 탈 수가 없다네
너무 행복한 사람도
너무 슬픈 사람도 역시 그렇다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행복한 사람만을 태운
버스가 투덜거리며 출발을 하네
내 호주머니 얇은 동전도 짤랑거리고
내 머릿속을 온통 갉아먹던 삶도
푸들거리며 흔들리고 있네
뽀얗게 바람 날아드는 길들이 아니면
갈 수 없는 몸, 발통에 불붙듯 움직여
목적지가 가까운 사람하나를 낳네
작은 보따리에 젖은 생선이 삐쭉 빗겨 나와
곱슬머리 듬성한 기사에게 눈물을 던져주네
골짜기엔 불빛인가 반딧불인가 가물거리고
보따리를 잡은 손은 더 이상 보이질 않네
밤이 많이도 지나 나도 내릴 곳을 찾네
산꽃이 너울거리는 곳도
밤새가 푸드덕거리는 곳도
이슬이 밤마실 나온 푸른 잔디밭도 좋겠지만
다시 배를 채운 동네주유소 뒷길에서
달랑 몸 하나 미련 없이 던져보네
세 살배기 아이의 웃음과 낯익은 약속들이 춤추는
사람의 길을 또 다시 투덜거리며 완행버스는 달려가네

 

출처, 문학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