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임정일 시모음 본문

OUT/詩모음

임정일 시모음

휘수 Hwisu 2006. 5. 7. 00:28

영등포문협 회원
격월간 시와창작 발행인
혈시 운영위원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아내 그리고 여자> 도서출판 화담
시집 <아내의 노래> 책나무 출판사
공저시집 <마음에 그린 사랑 하나>
공저시집 <사랑이 나에게 아름다운 것은>외 다수

홈페이지 
http://www.poet22c.com
     
http://www.lim.zoa.to

 

 

부드러운 착지

여리고 푸른 것이 벽을 딛고 올라선다
한 놈 한 놈
한눈을 팔 때마다
어디서 그들은 모여드는 것인가

아랫놈이 슬몃 길을 놓아주면
금방 어린 것을 무등 태우고
높고 가파른 벽을 향해 한 발, 한 발 천천히 기어오른다

저 담장 끝 무엇이 그들을 오르게 하는가

 

오르고 보면
현기증 나도록 어지러운 추락

담쟁이는 추락하지 않고
한 손 한 손
어린 것들의 손을 잡아 내려놓으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부드럽게 착지하는 것이다

 

서울행

 

1.

굴뚝 연기도 잠든
밤 찾아들면
승냥이도 무서워 울음 우는
산 마을


마실 갔다 돌아온 어미
늘어 놓는 푸념 소리
"서울 가면 잘 살수 있다는데...."
아비가 듣고, 아이도 잠든 꿈결에 들었다


파리한 달 하나
문틈으로 숨어 듣다
개 짖는 소리에 놀라
구름 속으로 달음질 친다.


승냥이도 무서워 울음 우는, 산마을
밤은 깊은 잠에 빠졌다

 

2.

보리 꽃 피기는 이른
아직은 우수(雨 水)


뒤 곁 대밭
잔바람에 이파리 울음 운다.


쌀독 긁는 바가지 소리
산허리 휘감아 되돌아 올 제


"그래 가자, 이래 사는 거나..."


초승달 같은
다랑이 잔 서리 내리던 날
빈 지게에 걸린 달 무거워
허리 곧추 세워도 일어서지 못했다.


3.

흰 눈 소복한 논뚝 길을
달빛 손전등 삼아 길을 내며 가고 있다.


어미 손 꼭 잡은 사내아이
선잠 깬 걸음은 구름을 걷는다.


힘겨운 그림자 쉬어 가자 조르고
별들은 길 서두르는, 아직도 까만 밤


눈 젖어 무거워진 발걸음 내딛는
아비의 등짐이 달빛에 황소만 하다.


고불고불 길 돌아 기차역
동이 트려는지 먼 산에 붉은 기운이 돈다.


ㅡ 1967년


*다랑이: (비탈진 산골짜기 같은 곳에 층 층으로 된) 좁고 작은 논배미.

 

봄을 앓다

 

담장 아래 세워둔 자동차가 말썽이다
어디서 라일락 향기 훅 끼쳤나 보다

 

사거리를 지나오는데
아무 데나 고개를 디밀더니
드디어 이쁘장한 흰색자동차의 엉덩일 들이받아 버렸다

 

봄 냄새 물큰 풍긴다

 

정비소에 갔더니
신경안정제 한 알 준다

 

밤새 거니는 벚꽃 놀이로 발 부르트는 저녁
나는 폐차처럼 누워 감기 한번 되게 앓았다

 

기와지붕 위에 내리는 비

비가 오네
허름한 기왓장 위
늙어 굽어 버린 등짝을
토닥토닥
순이 이사 갈 때 던져 놓은 곰인형
옆집 철이가 얹어 놓은 바람 빠진 축구공
할머니 마실 갈 때 신으시던 쓰리빠 한 짝까지
감나무에 파란 감도 떨어져 내렸지 툭
기왓장 하나 탁
주인할아버지 회초리
치켜올린 헛기침에도
도란도란 젖은 실타래
전깃줄에 널어놓고
손녀 같은 여름비 조물조물
비 맞는 기와지붕마다 안마하는 소리
비 맞는 기와지붕마다 허리 펴는 소리
기왓장 쩌억 갈라지게
성큼 와 앉는 무더위 엉덩방아 찧는 소리

 

 

홀로 서 있는 나무

예 받치고 섯지 말고
양팔 다정히 내려 굽어 베고
한 사나흘 누웠으면 어떠리

지상의 시간이 모두 내려
호젓이 물들고
수런수런 귀엣말도 강물처럼 흘러들어
순하디 순한 땅에 엎드리면

비스듬히 괴인 하늘일랑
척척 접어 얹어 두고
더러는 앉고
더러는 누워

구비고 서리던 대지의
불면의 고백에
의젓이 침묵하는 장수여도 좋으리

하늘치고 오를듯 뻗은 가지 이랑마다
세월은 저물어
곧은 바람도 휘어져 가느니

 


보고싶다는 말 
              
한 줄의 문장 같은 전화를 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사전을 뒤척이다
뚜뚜뚜
빨갛게 언더라인을 치고
형광펜을 덧칠한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외고 또 외며
퀭하니 지새운 밤
수험번호를 적듯
번호를 누른다
일이삼-사오육칠-공공구구
음악이 흐르고
메케하게 흔들리는 전자음
내 머리는 또다시
하얗게 백지가 되고 마는
보-고-싶-다-는...그 말 한마디...

 

외등을 세우다
               
외등은 혼저다
달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밤이면 데리고 온 발자국이 깊었다
발자국으로 푸른 안개가 바다처럼 차올라
별들은 모두 수면 위로 몸을 던졌다
영혼들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바다로 간다고 했다
나는 고립한 우주의 바다를 보았다
수없이 되고자 했던 모자란 꿈들이
투신하는 밤
바다는 잠시 길을 열어 영혼을 인도하고
나는 온몸이 해초에 감기는 꿈을 꾼다
외등은 혼저다
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밤이면 바닷고기들은 하늘을 날았다
바닷고기들은 아가미를 열어 은빛 비늘들을 쏟아 놓았다
나는 온몸에 비늘이 돋는 꿈을 꾼다
비늘이 돋아 발자국을 이끌고
고립한 바다 한가운데 외등을 세운다
외등 아래 사내의 지느러미가 퇴화하고 있다.

 


詩 人 

사랑보다 목마른 것은
목줄 타는 한 편의 시였다.

기름기 없는 손가죽을 훑어
파리한 한 줄 글을 품고 앉아
분내나는 여인을 꿈꾸었다.


가나다라마바사
글자들이 분주히 일어서는 밤

가난한 영혼을 발가벗겨 흥정하고
별 아래 누워
혼곤히 밀려오는 바람 속을
한 줄 시가 되어 걸어 간다.

 

누이

눈물도 곱다. 내 누이는

삼칠일 홍시 되어 붉더니
고운 꽃이 돼 버렸다.

어메는 불은 젖가슴 칭칭 동여매고
멍석에 고추를 너시며
"고놈 고추 맵기도 허이"

어메의 고추눈물은 몇 일째 붉고
삼밭 가는 새벽길에

아버지는 바짓가랑이 젖도록
지게막대기 부여잡고 우셨다.

 

귀향


고향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한다.
어지러운 발자국들과 놓칠세라 꽉 잡은 손과 손
급하게 앞지르며 달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바람이
어깨를 툭 치며 사라졌다. 
푸석 푸석 씁쓸하게 안개 피어오르는 개찰구를
지친 어깨로 밀며 빠져나와 기차에 오르면
뚜걱 뚜걱 저녁 이끼 어슴푸레한 흐린 불빛 아래
고향으로 가는 길은 혼자라도 좋다.
그물 망 속에 담긴 사과 빛이 고갯마루 잘 익은 노을처럼 붉고,
삶은 계란 고소하게 허물 벗는 고향이야기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홍익회 직원이 끌고 가는 수레바퀴에도 흥이 돋는다.
몇은 졸고
수런수런 어깨를 맞댄 연인들은 무엇이 좋은지 연방 웃음이다.
어둠이 차창에 기대와
그 옛날의 계란장사와 그물 망 속에 담긴
사과 파는 장사치가 그리워지는 밤
시원한 맥주 캔 하나와 씁쓰레한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고향집 폐교의 낡은 칠판 같은 히뿌연 차창에
그리운 이름들을 그리다 지운다.
한숨 자고 나면 고향 역에 닿을 것이다.
셀 수 없는 살들을 품었을 의자에, 나도
몸을 맡긴다.

 

되고 싶다

 

없으면 보고 싶고
만나면 편하고
헤어지면 그리운

 

내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사랑 하나 만들고 싶다.

 

없으면 간절하고
만나면 따스하고
헤어지면 아쉬운

 

그 사람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사랑 하나 되고 싶다.

 

사랑은 폭풍처럼

잔뜩, 웅크려
옷깃을 부여잡고
온 힘으로 방어해도

사랑은
순식간에 달려 들어
날치기하듯
빼앗아 가 버리는
폭풍 이더이다.

 

당신이 오시려나 봐요

무릎이 시리면
비가 온다 하였나요

몇칠 전부터
가슴이 시려 오는데
혹여,
당신이 오시려는 건 아닌지요.

 

넌 거기 있어

힘이 들면
힘들다 말하지

보고프면
보고프다 말하지

가슴속 깊이
쌓아 두기만 했구나

그리우면
그립다 말하지

사랑 하면
사랑 한다 말하지

가슴 가득
넣어두기만 했구나

이젠...

넌 거기 있어
내가 갈께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홀씨  (0) 2006.05.07
[스크랩] 속죄양, 유다  (0) 2006.05.07
이생진 시모음 1  (0) 2006.05.06
이생진 시모음  (0) 2006.05.06
신지혜 시모음 / 현대시학  (0) 200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