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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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5. 6. 14:23

무명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 까지
뜬눈으로 살자

 

 

추억

한 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시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 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시와 아내

 

나는 아내가 없을 때
시를 쓴다

산에 함께 오르던 아내가
미리 내려갔다
그때부터 시가 솔개처럼
빙 도는 산허리

시는 아내 대신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시를
아내 모르게 쓰는 때가 많다

 

 

詩集시집은 소모품 
  

요즈음 시집은 소무품이다
변소에 가지고 가도 종이가 두꺼워서
쓸 수 없다
시 한 편 읽을 시간은
똥 한번 누는 시간인데
시집을 화장실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은
시협(詩協)에서 고객으로 모셔야 한다
시가 워낙 흔해서
고물 장사 아저씨도
새 시집이 아니면 엿을 주지 않는다
소월素月이 저리로 밀려나고
이상李箱도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요즈음 시집은 소모품이서
샴푸 린스 그런 빈 병과 함께
내 시집도 리어커에 실려 있다

 

 

빈센트


사람들은 그를 고흐라 부르는데
그는 빈센트라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의 눈에 글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던 날
그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나오다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비문을 읽고 놀랐다

‘빈센트 반 고흐
1852년’

“엄마 이게 뭐야?”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하고 다시 묻자
“네 형의 무덤인데 형은 죽고
일 년 뒤 바로 그날 네가 태어났다”

1853년 3월 30일
형의 이름으로 태어난 빈센트
그는 빈센트라 불러주기를 원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고흐라고 부른다

 


시가 안된다

 

내 몸에 너무 살이 찌면
시가 안 된다
은행에 자주 드나들면
시가 안 된다
화려한 식당에 산적된 음식 앞에서는
시가 안 된다
내 양심이 썩어서
너무 썩어서 흙도 싫어할 때
시가 안 된다
술에 너무 빠져서 나를 잃을 때
시가 안 된다

 

고독의 씨

 

귀뚜라미는 어두울수록 목소리가 슬프고
호박꽃은 날이 밝을수록 시들어간다
서로 살아온 고독의 경험
고독은 무당벌레의 등에도 앉아 있다
네온사인으로 눈부신 도시의 귀뚜라미
살 곳이 없어 휴지통에 숨었다가
쓰레기 하치장까지 끌려가고
다행히 휴지통을 뛰어나온 귀뚜라미도
에프킬러에 피살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엔
무공해 음성도 숨을 거둔다

 

관능의 소리

 

진달래꽃이 바람에 못이겨
관능의 소리를 낸다
왕벌이 와서
진달래 꽃살을 찌른다
나비처럼 파르르 떤다

봄은 사계절의 성기                               
 
봄은 사계절의 성기와 같은 것
그것이 있기에 산에 성욕이 생긴다
나무를 잉태하고
물을 잉태하고
새를 잉태하고

산은 겁 없이 태양과 만난다
그들이 신나는 성교 때문에
바윗돌이 흥건히 젖고
진달래가 철없이 태어난

다시 나 혼자다                                    
 
커피니 쇼윈도우 그런 것은 도시의 향수이고
지금 여기서는 촛불처럼 조용한 지옥일 뿐
그렇다고 절망으로 대응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정적이 노래로 깨질 분위기도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내버려지는 데 익숙해 있다
바람도 내 앞에까지 와서 발을 멈춘다
어디로 갔나
쓸쓸한 곳에서는 바람도 동반인데
금세 나를 두고 어디로 갔나

 

보다 외로운 날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나는 애들처럼 초콜렛이 먹고 싶다
바다는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내게 달라붙지 않는다
바윗덩어리는 남의 종교처럼 차갑고
보리밭에 부는 바람이나
떠가는 구름도 초콜렛만큼 달지 못하다
나는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초콜렛 생각으로 깊은 침을 꺼냈는데
아무것도 녹일 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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