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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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0. 31. 10:55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당선
1994년 첫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6년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지성사
1999년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2001년 <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6년 <의자> 문학과지성사

 

물소리를 꿈꾸다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올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대통밥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풋사과의 주름살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잔 바람에도 바닥으로 쏠리는
담장 위 호박 넝쿨을 위해
마루 밑을 뒹구는 박카스
작은 병 속에 물을 담는다
이제 호박 줄기 상하지 않도록
사료푸대 오려 붕대처럼 감고
광목실로 묶는다
호박 줄기 지긋 잡아당기며
고드랫돌처럼 작은 병들이 매달린다
피로 회복과 자양 강장이
팽팽하게 힘 겨루기를 시작한다
아슬아슬 균형의 틈을
비집고 가는 오른손

 

다행이다, 모가지는
묶어 매달기 알맞게 잘록하다
어둠을 짚어 나가는, 덩굴손을 위하여
네 목과 내 목은 수평으로 짱짱한가

 

마디

 

마디와 마디 사이에
두 가닥씩 칼금이 그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나무는
그 등고선의 기울기와 간격으로
하늘 높이 몸을 디민다

 

새가 대나무 꼭지에 앉는다
수많은 마디들이 새의 무게를 갖고 논다
또한 새떼의 수많은 뼈마디가
대나무를 흔들며 합창을 한다

 

바람의 마디와 하늘의 마디도
대밭, 둥근 방으로 몸을 퉁기며 노닌다

 

시끌벅적 앞다투는
댓이파리들의 노래 위에 눈이 쌓이면
대나무는 간혹 몸을 꺾는다
백설의 마디며 물의 마디를 모르는
이파리들의 고성방가들

 

대숲 속에는 마디를 모르는 것들이
바닥을 덮는다, 켜켜이
썩어가는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하얀 대뿌리, 그 잘디잔 말씀이 뻗어나간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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