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언 시모음 본문
1973년 부산 출생.
1998년 『시와사상』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2003년 천년의시작), < 거인> 2005년 렌덤하우스중앙
키스
나는 나라고 가끔씩 싱거운 생각을 한다. 너는 너라고 가끔씩 싱거운 맛을 본다. 내 생각이 어디 발라져 있나, 물어보면 손가락을 쭉 뻗어 내 입술을 가리킨다. 너는 너라고 맛은 네가 보고 내 입술은 달다 쓰다 말이 없다. 한없이 거추장스러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혀를 깨물고.
자두나무 당신
당신과 내가 간편한 사이라서
헤어져도 좋은 간편한 사이라서
당신의 수첩에서 간편한 내 이름을 지우고
냉큼냉큼 잘도 받아먹은 씨앗들
당신의 씨앗들 모두 뱉아서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잘가, 하고 부르면
당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딱 한번 돌아보고
가서는 아니 오고
영영 아니 오는 당신에게
간편한 당신에게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자두나무가 되어
불알 주렁주렁 달린 자두나무가 되어
우리 사이에 너무 간편해서 좋은 우리 사이에
씨알 굵은 당신의 목소리를 토해서
게워내서
더러워 더러워
내가 다시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내가 아니라서
간편한 내가 아니라서 불편한 당신은
안개 자욱한 자두나무 숲이 되어
운다네 자두나무 자두나무
당신의 온 숲을 흔들어 운다네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깨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새의 윤곽
아주 먼 곳에서 하늘은 있다.
너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아주 먼 곳에서 공기는 빛나고 날은 흐리다. 맑은 날이면 구름이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너보다는 느린 속도로 하늘에 구멍을 내고 아주 먼 곳에서 흐린 날까지 걸어서 온다. 구름에는 비의 두 발이 언제라도 숨어 있다.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모이를 쪼듯 땅을 후벼파는 빗방울도 너와 함께 너의 이웃들. 잊어먹지 않고 다시 올라가는 너를 둘러싼 공기방울도 너처럼 배가 부르지는 않다.
너를 말하기 위하여 너는 거기 있다.
한동안 네가 있다는 것만 확인되는 까만 점 한 귀퉁이에서 문득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고 너는 그러고도 한참을 떠 있다. 바람 속인지 구름 속인지 너의 내부는 배부른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하늘 속,
보이지 않는 구멍에서 온 하늘바닥으로 너는 날개를 친다. 너를 말하지 않는 곳에서 비는 내리고 누구보다 큰 발자국 소리로 너는 걸어서 온다. 아주 먼 곳에서
또 한번 구름이 되는 것을 구경할 것이다
물구나무 당신
자두 속에 자두나무가 산다면
불알 주렁주렁 달린 자두나무가 숨어 산다면
물 속에는 물구나무 당신이 누워 산다
물구나무 당신이
똑바로 서서 산다
당신과 정반대인 당신이
주름 많은 당신이
당신과 똑같은 당신을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산다
바람 많은 당신이
씨알 굵은 당신을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그렇게
자두 속에 자두나무 당신이 산다면
내 물 속에는 물구나무 당신이 산다
불알 주렁주렁 달린 내 나무가 산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